양식도 일도 모두 주님이심 (요 6:22-29)
물질적인 양식을 아무리 먹어도 어차피 우리의 육신은 언젠가는 죽는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무리의 사람들은 주님을 열성적으로 좇아다니게 되는데, 주님이 어디 가시는지 주시했지만 이미 바다 위를 걸어 건너편으로 가셨기 때문에 찾지 못하자 가버나움까지 배를 타고 주님 찾으러 떠났다. 결국 주님을 발견하고 "랍비여, 언제 여기에 되셨습니까? (25절)" 이라고 여쭙는데, 언제 여기에 '있습니까?' 라고 묻지 않는다. 그렇게 묻게 되면 주님께서 '나는 ~이다'로 답하게 되시기 때문에 '되었습니까?' 로 물었던 것 같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던 단지 '무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멘 아멘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고 있소. (당신들은) 표적들을 봤기 때문에 나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요, (빵) 덩어리들 밖으로(부터)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오" 라고 답하시는데 (26절),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보여주는 '표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빵 덩어리들에만 관심이 있었다. 여기 '배부르다 chortazó 코르타조' 라는 말은 목초지 혹은 풀(고전 3:12) 등을 의미하는 '코르토스'라는 말에서 온 단어이다. 그래서 '배'라는 말은 없고 초장의 풀들로 양들을 먹이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주님의 백성들은 그의 기르시는 양으로 묘사가 되었고, 따라서 목자이신 하나님 혹은 주님께서 양들을 먹이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27절에 있는데, 주님께서는 "썩고 있는 양식이 아니라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그대들에게 줄 영원한 생명 안으로 거하고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으라 아버지께서 그를 인치셨기 때문이오."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 '썩다'라는 말은 요 3:16 '멸망하지 않고'와 같은 단어인데, 무언가가 썩어 부패한다는 의미이다. 물질적인 음식은 때가 되면 썩고, 아무리 먹어도 죽으면 육체 역시 썩어질 것인데, 이렇게 짧은 시간만을 충족케하는 음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 안으로 거하고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 '주다'의 시제는 미래인데,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한 참된 양식이시지만, 썩을 것을 추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직 자신을 주실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거하고 있는 양식'은 앞으로 온전히 '주님 안으로 믿을' 이들에게 '주실' 것이다. 이것은 '양식'이라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 안으로 거하고 있'다. 이것을 위해 일하고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양식' 특히 '사람의 아들이' 그들에게 줄 것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 무리들은 '일'에 초점을 맞춰 "무엇을 (우리가) 하고 있어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는 것이 됩니까?" 라고 주님께 묻는다. 논리적으로라면 '이 양식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혹은 '우리에게 주십시오' 라고 해야했겠지만,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과는 상관없이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들'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니 곧 그가 보내신 이 안으로 믿고 있는 것이오." 라고 다시 당신 자신에 대해 답하신다.
주님, 주님 외에는 없습니다. 참된 양식도, 그 주시는 분도, 영원한 생명도, 초장도,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것도 모두 주님을 떠나서는 할 수 없음을 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분이 계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안으로 더 인도하시고 우리를 살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