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 때가 참, 유대인들 (요 7:1-13)
주님의 육적인 동생들 즉 마리아가 후에 요셉을 통해 낳은 형제들 역시 주님을 믿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과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 보고 신비하게 여겼었겠지만, 함께 자라온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을 메시야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받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에 주의 형제 야고보는 그의 서신을 쓰면서 주님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약 2:1)' 라고 기록하며 그의 육신의 형이신 주님을 이제는 메시야로 부른다.
하지만 이때 당시에는 아직 주님 '안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소위 자기PR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갈릴리 촌구석 보다는 유대 땅 특히 장막절 행사가 있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라고 청한다. 3절 후반부는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도 당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볼 것입니다'가 되는데, 보통 '볼 수 있도록' 즉 가정법으로 번역되었지만 여기는 미래시제로 되어 있다. 즉 그들의 형제인 주님께서 명절에 올라가면 제자들도 주님의 일들을 분명 볼 것이다 라며 자신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확신하며 주님을 독촉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원했는데, 지극히 인간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요한은 이에 대해 '그의 형제들은 아무도 그 안으로 믿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5절)' 라고 증언한다.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전도해야 하며 기회를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주님을 전해야 할 것이지만 (딤후 4:2), 그렇다고 세상 방법을 써서 무분별하게 전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려해 봐야 한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벧전 3:15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라고 말씀하며 먼저 우리가 '거룩하'여야 함을 말씀하고 주님에 대해 묻는 자들에 대해서는 '항상 준비하'지만 그 말씀을 전할 때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 함을 말씀한다. 베드로 처럼 다혈질적인 사람이 주님 안에서 변화되어 이렇게 조언하고 있는데, 우리가 전하는 것은 이야기나 정보가 아니라 생명이며 진리이신 한 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으로 전달하는 이에게 비쳐지게 된다.
6절은 시제가 잘못 번역되었는데, 원어에는 모두 현재진행형으로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때가 아직 오고 있지 않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된 (것) 이다'로 되어 있다. 8-10절은 '너희들은 명절 안으로 올라가시오. 나는 이 명절 안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아직 내 때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들을 그들에게 말하심으로 (그는) 갈릴리 안에 머무셨다. 그런데 그의 형제들이 명절 안으로 올라갔을 때, 그도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비밀 안에 처럼 올라가셨다.' 라고 하는데, 마치 주님께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사역을 위해서는 가끔 비밀리에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이것이 거짓말이 아닌 것은 '아직 내 때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의 때는 '이 명절'도 아니고 그의 형제들이 올라간 때도 아니며, 다만 '채워지는' 카이로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비밀리 올라가셨던 때가 바로 그 때가 채워진 시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7절에 주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미워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그의 일들이 악함들 이라고 그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신 부분인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 보다는 유대교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주로 비판하시며 악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당시 유대교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주님 앞에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일들은 악함들 이었다.
유대인들이 그를 찾았었는데, 1절 말씀처럼 주님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무리들은 주님에 대해 왈가왈부 했지만 이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려했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당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왔지만, 정작 그들은 유대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불리지는 않았다. 특별히 예루살렘 땅을 지키며 성전을 고수하던 이들에 대해 그렇게 불렸는데, 그래서 이 '유대인'이라는 말이 추후 2천년 동안 핍박과 멸시를 당하는 말이 되었다. 복음서는 물론이고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 역시도 여러 말씀을 통해 이 유대인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기록했다 (고후 11:24, 갈 2:13, 살전 2:14, 살전 2:15, 딛 1:14 등등).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된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유대인들은 세상과 다름없다.
주님, 세상으로부터 또 종교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음으로 의기소침하지 않고 항상 주님의 채워지는 때, 우리에게는 항상 준비된 그 때에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소서. 삶의 의미와 목적과 내용이 주님 한 분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