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인가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요 7:14-24)
14절은 '이제 그 명절의 중간이 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성전 안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가르치셨었다'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는 명절의 처음이 아니라 중간 쯤이었음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명절로 인해 성전은 말할 수 없이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고 그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성경을 강론했을텐데, 시골에서 올라온 신분으로서 주님 역시 당당히 가르치실 수 있었다. 2천년 전에 이렇게 자유로운 토론과 가르침이 허락 되었었는데, 현재는 오히려 사제들이나 목회자들만 발언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뿌리박혀 있다.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유대인들은 놀라며 "어떻게 이 (분)은 배웠지 않았는데 글들을 알았는가?" 라고 말한다. 목수라는 가업을 넘겨받아 배움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입으셨던 옷도 아마 외모적으로는 지식이나 율법을 논할 수 없어 보이는 분이었기에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글 grammata'은 '말씀 logos'의 '형식'일 뿐, 주님이 로고스 그 자체이심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의 것 (이오)" 라고 답하시는데, 앞에서도 말씀하셨지만 주님은 자신의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말씀 자체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 보내신 분 즉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시며 또 인간으로 보이는 '그 사람의 그 아들'이신 주님께서는 사실 하나님의 가르치심으로 가르치셨다.
이에 대해 17절은 '만일 누구든 그의 뜻을 행하고 있기를 뜻하는 이는 그 가르침에 대해 하나님 밖으로 (부터) 인지, 혹은 내 자신으로부터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오'라며 '앎' '깨달음' 혹은 '경험'을 말씀하신다. 여기 '알다 ginosko'는 바로 경험을 통한 앎 혹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주님의 말씀을 깊이 파고 들어 그 의미를 깨달을 때 마다 과연 그 말씀은 인간 지식의 차원이 아님을 깨달을 때가 적지 않다. 특히 '그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용되는데,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뜻하는' 이들은 주님 말씀이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종교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말씀이심을 깨닫게 된다.
많은 선생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그 속한 종교의 경전을 따라 말을 하지만 대부분 그들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자신으로부터 말하고 있'고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특히 사람으로부터의 영광이 필요 없으시다. (물론 그 영광을 받으실 때는 온다) 다만 '그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이는 참된 (자)'이시며 따라서 '불의가 그 안에 있지 않'다 (18절). 이러한 말씀을 듣는 자들은 '유대인들' 즉 종교인들인데, 그들의 감추었던 마음을 들켰을 것이다. 서로 토론하며 논쟁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며 얼마나 서로 더 종교적인가 과시하여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취하기 원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헛되다.
더우기 주님께서는 '모세가 그대들에게 그 법을 주었지 않소? 그리고 그대들 중 아무도 그 법을 행하고 있는 이가 없소'라고 그들을 폭로하시는데, 유대인들은 종교성이 강했지만 결국 그 행위 혹은 삶 속에서 모세의 '그 법' 즉 율법을 '행하지'는 않았다. 말로만 종교인들인데, 사실 그것이 바로 '종교인들' 혹은 '유대인들' 혹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갑자기 '왜 나를 죽일 것을 찾고 있소?'라고 물으시는데, 문맥상 맞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을 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무리는 "다이몬을 (당신은) 소유하고 있소. 누가 당신을 죽일 것을 찾고 있소?"라고 답한다. 하지만 1절에 이미 기록되었듯이 유대인들은 주님을 계속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도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주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듯 오히려 주님께서 '다이몬을 소유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사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21절 주님께서 한 일을 내가 했소 그리고 (그대들) 모두 놀라고 있소 (혹은 의아해 하다, 기이히 여기다)' 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결국 그 모든 일들은 '한 일' 즉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버지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6:29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도 말씀하셨는데, 종교인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는 소위 신성모독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모세에 의하면 그러한 주님은 죽여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모세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22-23절은 '모세가 그대들에게 준 이 할례를 - 모세 밖으로 (부터) 임이 아닌, 그 아버지들 밖으로 (부터) - 통해 그리고 (또한) (그대들은) 안식(일) 안에 사람을 할례하고 있소. 모세의 그 법이 풀려지지 않을까 하여 만일 사람이 안식(일) 안에 할례를 받고 있다면, 내가 안식(일) 안에 한 사람 전체를 건강하게 했다고 나에게 분개하고 있소?'라고 물으신다. 구약은 성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행해지지만, 성전이 무너진 경우 결국 경전 즉 말씀 혹은 율법으로 돌아가는데, 그 율법 안에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구약의 명령 중에 가장 종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할례인데, 모두 '보여지는' 것들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명령은 십계명의 4번째 계명이지만, 그 이전에 세가지 앞선 계명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왠지 이 안식일 문제 특히 단순히 '지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출애굽기 20:11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새번역)' 라는 보다 더 중요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안식은 깨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던 이유는 바로 그 안식의 이유와 목적을 깨닫고 정말 '지키'라고 하신 것이었지만, 그들은 단지 종교적 의무로 여기고 그로 인해 주님을 믿을 수 없었다.
할례 역시 유대인들의 프라이드였는데, 율법은 남자 아이가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할 것을 명하지만, 그 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안식일로 떨어지면 할례를 해야할까 아니면 하면 안될까 라는 논리적 의문에 대해 결국 안식을 깨고 할례를 행했다. 즉 둘 다 지킬 수는 없는 것이기에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안식일 보다는 육체적 프라이드인 할례를 택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자존심' 문제인 할례를 위해 안식도 깨는 선택을 당연시 여겼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온전하게 고치시는 것은 색안경을 끼고 보며 비난거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겉모양을 따라 심판하'는 (혹은 판단하는) 것인데, 특히나 종교심이 강한 이들은 이러한 것에 매우 민감하다. 우리는 종교인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소위 '교회'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지만 주님께서 만약 '교회'에서 나오라고 하실 때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주님께서 왕이시고,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 종교인을 탈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주님(여호와)을 위한다며,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오히려 주님(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되어 있는 것으로 전락하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그 '한 일'을 저도 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