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앎으로 주님께 오고 있음 (요 7:25-36)
지난 17절의 '알다'는 ginosko이지만 26, 27절의 '알다'는 eido로 직접 경험을 통해서가 아닌 일반적인 '앎'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주님을 알았다는 말에 그와 동일하게 '그대들은 또한 (과연) 나를 알았'다고 답하신다. 그들이 주님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온전히 알지는 못했다. 유대인들 중 특히 예루살렘 출신 사람들은 종교의 핵심인 성전이 놓였던 곳에 살던 사람들로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듣고 또 '알고' 있었다. 주님에 대해서도 '어디로부터 인지' 즉 주님의 출신 배경은 알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대들은 또한 (과연) 나를 알았소 (eido). 그리고 어디로부터 (나는) 이다(를) 알았소'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는데, 주님은 '내 자신으로부터 (내가) 온 것이 아'님을, 그리고 주님을 보내신 '참되신 (분)'을 그들은 알지 못했음에 대해 외치셨다 (28절).
하지만 주님은 '그'를 아셨는데, 여기 역시 eido이다.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에 대해 일반적인 '앎' 수준의 지식도 없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로부터 함께 이다 또한 그가 나를 보내셨'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29절). 이러한 답변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아직 주님의 때가 아니라서 그러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이들이 이렇게 주님을 배격했지만 무리 중에는 또 한면으로 '많이들 그 안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셨을까 한 때, 이 (분)이 한 것보다 더 많은 표적들을 행하실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다지만 사실 주님께서는 많은 표적들을 이미 보이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은 주님을 잡으려고 바리새인들에게 속한 (사병) 군병들을 파송했다. 이 '파송하다'라는 말은 '보내다'라는 말 보다는 훨씬 공식적인 동사로 권위가 실린 말이다. 그들은 그들이 소유했던 권력을 사용해서 로마 군병도 아닌 그들만의 군병을 파송하여 주님을 잡으려 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들과 함께 있을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며 이제 주님을 보내신 분 앞으로 가고 있음을 말씀한다 (현재진행형). 하지만 미래에는 그들이 주님을 찾을 것이지만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는데, 그들은 주님 계신 곳으로 '오고 있을 수 없'기 (현재진행형) 때문이다. 지금 주님께로 오고 있지 않으면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
이 말에 대해 유대인들은 "이 (분)이 어디로 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를 못 발견할 것인가? 그리스인들의 흩뿌려짐 안으로 (그가) 가고 있어서 그리스인들을 가르치고 있으려는 것 아닌가? (그가) '나를 (그대들은)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못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 그대들은 오고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한 이 말은 무엇인가? (35-36절)" 이라고 묻는데, 제한된 시공간적이며 물질적인 이해만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며 승천을 통해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게 되실 것이기 때문인데, 지금 주님을 믿음으로 그에게 오고 있지 않으면 앞으로도 주님께 올 수 없다.
주님, 내주하시는 성령을 무시하지 않기 원합니다. 그 영은 주님이시며 주님의 영광을 구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귀하게 모셔야 하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내주하시는 부드러운 성령의 인도하심에 감사함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지금 주님께로 오고 있는 우리들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