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법을 앎 (요 7:37-52)


37절에서 주님은 "만일 누가 갈하고 있다면 내 앞으로 오고 있게 하라 그리고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여기 '오다'는 중간/수동태로 되어 있고, '마시다'는 능동태로 되어 있는데, 많은 구절에서 '오다'라는 말이나 '기도하다'라는 말 등이 중간/수동태로 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님 앞으로 오는 문제는 우리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주님에 대해 들어야, 즉 전도를 받는 것이 필요한데, 그래서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은 은혜다. 하지만 일단 그 앞으로 나오면 '마시'는 문제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38절의 동사의 시제가 중요한데, "내 안으로 믿고 있는 이는 그 기록이 말했던 것 처럼 그의 배 밖으로 (부터) 살아있는 물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로 되어 있다. 즉 주님을 믿는 문제는 과거 '믿은' 것으로는 부족하고, 추후 '믿을' 문제도 아닌, 지금 '믿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강들이 흘러나'오는 것은 미래 시제로 되어 있다. 즉 지금 믿고 있어도 그 강들의 흘러나옴을 아직 경험하지 못할 수 있는데, 특히 당시는 아직 성령이 '없으셨었기' 때문이다 (39절, 원어참조).  삼위에 해당하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미 영원전부터 계셨지만, 시간 안에서 아직 계시지는 않았다. 주님께서 승천하셔야만 시공간 안으로 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는 '그의 배'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는 문자적으로 신체적 복부를 의미하지 않고 사람의 깊은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단전이니 허리니 하는 소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은 위로 부터 부어지시고 채워지시지만, 그 후에는 내주하셔서 충만케 하시고 그를 넘어 살아있는 물의 강들이 되어 뿜어져 나온다. 주님의 약속은 이정도인데, 믿고 있는 우리는 과연 이러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는가?

이러한 놀라운 말씀에 무리들 중에 분열이 생긴다. '그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갈릴리 출신을 들어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 밖으로 (부터) 그리고 다윗이 있었던 곳 그 마을 베들레헴으로부터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42절)" 라며 묻는다. 하지만 이러한 물음은 오히려 주님의 그리스도 이심을 증명하는데, 그들은 몰랐었지만 주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군병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묻자 그들은 "결코 이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46절, 원어참조)"라고 답하는데,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다'라고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은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다' 라는 의미도 된다. 즉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당신들 또한 미혹되지 않았나? 관리들 밖으로 몇이(라도) 그 안으로 믿지 않았다 혹은 바리새인들 밖으로 (부터) 그러나 이 무리는 그 법을 알고 있지 않음으로 저주받은 (자들)이다 (47-29절)"라고 말하는데, 진리이신 주님에 대해 '미혹'이라는 말을 쓰지만 정작 마귀와 율법의 속박과 죄와 세상 그리고 종교권력에 미혹된 이들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주님과 그의 제자들이 '그 법을 알고 있지 않'은 이들이라고 말하는데, 여기 '알다'는 ginosko 즉 체험적 앎이다. 이러한 언급은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는데,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결코 그 법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했었다.  사실 율법을 제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51절에는 니고데모가 바로 그 율법을 들어 "우리의 그 법은 만일 먼저 그로부터 듣지도 않고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을 심판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묻는데, '그 법'을 말하면서 주님께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즉 행함에 대해 얘기하며 그들 자신들이 이러한 행함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과연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고 알기 싫어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가보지 않고 사람들을 보냈었다. 율법은 중요하지만 그 법 자체보다는 그것을 지키며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 원래 목적이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정작 그것을 '알지 못했'다.

주님, 그 법을 정말 알기 원합니다. 특히 죄를 깨닫게 하고 사망을 부르는 율법 보다는 주님의 생명의 성령의 법을 더 알기 원합니다. 한번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배로 부터 그 살아있는 물의 강들이 뿜어져 나올 때까지 체험하기 원합니다. 이를 위해 더욱 주님 안으로 믿기를 힘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