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죄도, 죄 가운에 사는 것도 끝남 (요 7:53-8:11)

사람들은 분쟁하고 시기하다가도 결국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올리브들 산으로 가신다. '감람산'이라는 말로 자주 오역 되었지만, 아무튼 주님께서는 자주 그 산에 가셨는데 (눅 22:39), 기도도 하시고 쉬기 위해 가셨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집이나 성전 건물 보다는 올리브가 열리는 산에서 쉬셨다. 주님의 안식은 단지 육신을 편하게 하는 것만도 아니고, 앞으로의 사역에 대한 전략을 짜기 위함도 아닌, 하나님 아버지와 시간을 가지시기 위함이었으며, 이러한 교제가 바로 다음에 벌어지는 주님을 시험하려는 이들에 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한다.

성전에서 잡힐 뻔 하셨지만 다시 일찍이 돌아 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앞에 간음함으로 잡힌 여자를 데려와서 그 가운데 그녀를 세워 놓는다. 그녀는 얼마나 수치스러웠으며 또 그 모습을 보는 백성들은 얼마나 민망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며 '이런 이들을(여성격) 돌로 치고 있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데, 전형적으로 종교권력자들이 약자들을 짖누르는 짓거리다.  그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거스르시며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꼬투리를 잡아 고발하려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아래로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쓰셨다. 원어로는 '땅 안으로' 라고 되어 있는데, 많은 이들이 거기 모인 사람들의 죄를 열거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 '땅 안으로' 쓰신 것은 다름 아닌 십계명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돌판 '안으로' 기록하셨던 때는 두번 십계명을 쓰셨던 경우였는데, 역시 주님도 두번 몸을 굽혀 땅 '안으로' 쓰신다.  과역 구약 처럼 다시 십계명을 쓰시며 주님께서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마도 '너희들은 이 십계명 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이다' 라고 하시지 않으셨을까?

그들이 방자하게 주님께 재촉하자 주님은 그들에게 "그대들의 그 무죄한 (자)가 먼저 그녀에게 그 돌을 던지시오." 라며 아오리스트 시제 즉 존대하며 답하신다. 그들의 시커먼 속을 다 아셨지만 그들을 높이시는 것이다. 그 말을 듣더니 '그 양심에 의해 책망 당하며 노인들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하나하나 나갔었다 (9절).' 라고 하는데,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보다 조금 더 죄가 더 많아 보이는, 혹은 자신의 죄들은 들키지 않았기에 특정인, 특히 현장에서 잡힌 이 가련한 여자를 맘껏 조롱하며 돌로 칠 수 있다고 생각 했었겠지만, 결국 '그 양심에 의해 책망 당했다.'  십계명의 제 1계명 조차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이 죄된 인생들이기 때문이다.

9절 후반은 '그리고 예수만 혼자 남겨졌다. 그리고 그 여자는 가운데 안에 있다'로 되어 있는데, 모두 다 떠났지만 죄가 없으신 주님은 남겨지셨다.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되셨음을 의미하는 듯 하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그 어느 누구도 남아있지 못하고 다 떠날 수 밖에 없었지만, 주님만은 남겨지셨는데,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 역시 그렇게도 달라들어 고소하려던 이들로 둘러싸였었지만, 이제는 모두 떠나고 여자만 있다.  이 죄인 여자는 '있음'으로 주님과 독대하며 그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다시 몸을 올려펴셔서 그녀에게 "부인이여, 그대의 고소자들 그들은 어디에 있소? 아무도 그대를 정죄하지 않소?" 라고 물으셨다. 여기 '여자여'라고 많이 번역된 말은 주님께서 그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르셨을 때도 사용했던 말로 단지 '여자여' 라는 뉘앙스 보다는 '부인이여' 라는 높임말에 가깝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더러운 죄인도 주님께서는 모친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부인이여'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헬라어 특성상 의문문과 일반문은 동일한데, 그래서 주님께서 '아무도 그대를 정죄하지 않소? '라는 물음은 문장 그대로 일반문으로 해석하면 '아무도 그대를 정죄하지 않소.'라는 말이 된다. 물론 의문문이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여." 라고 답하는데,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나 또한 그대를 정죄하고 있지 않소'라고 대답하신다. 즉 여기 '말하다'라는 말 대신에 '대답하다'라는 동사를 쓴 것은 이 여자의 말도 의문문일 수 있을을 말하는데, 따라서 '아무도 없습니까, 주여?' 로 번역할 수도 있다. 죄로 물든 인생들도, 자신도, 창조주이신 주님 조차 그녀를 정죄하지 않는다.

주님 안에 정죄는 끝났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죄함이 없다고 죄들 안에 계속해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더이상 범죄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데, 이 두 동사는 모두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어서 강한 언조이다. 주님께로는 살인자나 도둑이나 간음자나 음행자나 신성모독한 자나 동성욕자나 그 누구도 올 수 있지만, 그 은혜를 입어 정죄함을 벗으면 그러한 죄들 안에 계속 살 수는 없다.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이 되어 죄 가운에 계속해서 사는 것에서 해방시키신다.

주님, 가서 더 이상 범죄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 지금 이시간에도 저에게 능력이 되기 원합니다. 나의 육신은 정욕을 좇기 좋아하지만 주님은 범죄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것을 듣고 순종하게 하소서.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육신의 약함을 핑계하기 전에 주님의 강하심을 믿고 의지함을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