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하나이신 주님을 따를 때 우리도 주님과 하나됨 (요 8:12-20)

12절은 '다시 그래서' 라는 말로 시작한다. 즉 앞과 연결된 내용이라는 의미인데, 몇몇 사본에 간음한 여인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앞 7장 마지막 부분에 연결하면 오히려 더 맞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간음한 여인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추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만일 그렇지 않고 원래 기록되었었다면 이 여인의 일과 주님께서 다음에 하시는 말씀에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오. 나를 따르고 있는 이는 어둠 안에 결코 걷지 않소 그러나 생명의 빛을 소유할 것이오." 라고 말씀하셨는데, 역시 여기도 '에고 에이미'이다. 앞서 주님께서 "그대들의 그 무죄한 (자)가 먼저 그녀에게 그 돌을 던지시오." 라고 말씀하시자 '노인들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하나하나 나갔었다' 라고 기록했었는데, 아마도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자를 구경하다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선동당할뻔 했던 이들이 가책을 느끼고 특히 나이 많아 여러 죄들을 많이 지은 이들부터 시작해서 모두 자리를 떴다. 하지만 13절은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을 보아 바리새인들은 아직 주님 옆에 있었는데, 주님을 따르거나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 아니라 계속해서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도 않은 이들이다. 20절은 이 배경이 성전 헌금함 혹은 헌금 보고 였다고 기록하는데, 그래서 앞서 1절 '다시 성전'으로 오셔서 이 간음한 여인의 일이 기록된 배경과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시며 죄를 짓지 말라는 능력의 명령을 하시기에 또한 세상의 빛이시다. 죄에 묶인 사람들, 죄의 능력에 어쩔 수 없이 붙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셔서 사실은 죄에서 해방 되었음을 보여 주신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이는 결코 어둠 안에 걷지 않는 즉 죄 된 삶을 살지 않는다. 죄와 그 죄과에서 해방 되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의 빛을 소유하게 될 것인데, 생명도 주님이시고 빛도 주님이시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이는 주님을 소유하게 된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증언하니 그것은 참된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는데, 사실 침례자 요한이 먼저 주님에 대해 증언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주님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 자신이 증언하셔야 했다. 주님은 "또한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을까 해도, 내 증언은 참된 (것)이오. 나는 내가 어디로부터 온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오 (14절)"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 자신은 아시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증언하시는 것을 가지고 그들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육신을 따라 심판하고 있'었는데 (15절), 그래서 그들의 심판 혹은 판단은 옳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심판 혹은 판단을 하지 않으시지만 혹시라도 심판하시면 그 심판은 참된 것인데 '혼자 있지 않'고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16절). 원어로 이 부분은 조금 흥미로운데, '있다 (혹은 이다) eimi'를 주님에 대해 쓰셨지만 뒤에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동사가 없다. 물론 동사 eimi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 라고 하지 않고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하기 때문에 이 eimi는 '나'와 '아버지' 모두에게 적용된다. 즉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며 아버지가 주님을 보내셨지만 보통 '~부터 para'라는 단어를 씀으로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셨음을 말씀했기 때문에, 주님은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함께 오신 두 분 즉 구별되는 인격체이시며, 이 두 분은 '하나' 즉 동질 혹은 동격이심을 말해준다.

주님은 '당신들의 그 법 안'이라고 말씀하며 소위 '율법'의 기록을 일깨우시는데, '두 사람의 증언은 참된 (것)이다'라는 말씀에 주님 당신 자신과 아버지 두 분께서 증언하심을 말씀한다. 이에 대해 18절은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자이오. 그리 나에 대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하고 계시오.' 라고 기록하는데, 여기 역시 ego eimi이며 특히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자이다' 부분은 마치 구약의 '나는 여호와라'는 말씀처럼 능력있게 들린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 말고는 더 큰 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맹세를 하셨는데, 주님께서도 역시 주님 외에 증언할 수 있는 분이 없음을 말씀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하고 계심을 말씀하며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성부와 성자는 구별되지만 다르지 않은 '하나'이심을 의미한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오?"라고 물었는데, 이 물음은 그들에게는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들은 나도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몰랐소. 만일 그대들이 나를 알았었다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었을 것이오."라고 답하시는데, 이것 역시 당연하다. 둘은 지금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시지만 바리새인들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다.

20절은 '이들 말들은 (레마) 성전 안에서 가르치시며 헌납실 안에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그의 때가 오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하는데, 앞서 성전 어딘가에서 간음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벌어졌지만 이제 성전에 헌납된 물품들을 보관하는 '헌납실'로 공간이 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성전'이라는 곳에는 여인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가련한 여인을 성전까지 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헌납실에서 말씀하시는데, 여기에는 거룩한 성전 안에 '물질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십일조나 여러 헌물들로 채워져 있었을텐데 여자를 끌고 성전 안으로까지 들어온 바리새인들을 이제 주님께서는 헌납실로 이끄신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음성을 듣는 것 보다는 물질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눅 16:14).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상 그들의 마음은 물질에만 가 있었다. 그들은 어둠에 다니고 있었고, 빛이신 주님과는 반대였다.

주님, 말씀으로 우리를 비추소서. 주님을 믿는다고 따른다고 하면서 정작 숨겨진 것들이 적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 처럼, 주님을 따를 때 우리도 주님과 하나됨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