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 추구에서 희락 추구로 변화해가며 삶의 전부를 드림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됨에 관하여 서기관들 혹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주님의 질문이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가 정치적인 힘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으로 여겼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육적인 '다윗의 자손'이라면 왜 다윗이 '그 거룩한 그 영 안에서 (원어 참조)'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라고 고백했는지 물으신다. 즉 참된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는 시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주님이신데, 다윗은 이러한 비밀 혹은 신비를 깨달았던 선지자였다.
이러한 진리를 주님께서 밝히시자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들었는데, '즐겁게'의 원어는 '헤데오스'로 신약 막 6:20, 12:37, 고후 11:19에 3번 나오며 모두 '즐겁다'는 의미지만, 그 어원은 '헤도네'로서 성경 여러 곳에서 '쾌락'으로 번역되며 모두 부정적인 뜻의로 쓰인 말이다.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소위 '헤도니즘'이 이 단어에서 파생했는데,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를 짐으로 세상적 쾌락은 좇지 않지만, 주 안에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어야 한다. 갈 5:22에도 성령의 열매가 '아가페'임을 말하며 그 첫번째 의미가 '희락 (카라)'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를 짐으로 스트레스만 받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해야 한다.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때 진정으로 주께 전부 드리는 삶이 가능한데, 그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이들이 그러한 쾌락을 위해 기꺼이 많은 돈을 허비하는 것 처럼, 나의 기쁨의 원천이 주님이심을 깨달을 때 우리는 주께 드리기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를 말씀한 것이 바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인데, 화폐 단위로는 보잘것 없지만 그녀는 '궁핍할지라도 (혹은 궁핍함으로부터, 에크) 그녀가 소유했던 모든 것 그녀의 삶 (원어 생명 비오스) 전부를 넣었'다. 모든 한글 번역본은 '생활비' 혹은 '생활에 필요한 돈 (쉬운 성경)' 등으로 번역했지만 원어는 '그녀의 생명 (혹은 삶) 전체'라고 되어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지 돈이 아니라 '혼 (프쉐케)'을 비롯 '삶 (비오스)' 전부를 드리는 것이 주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기부와 헌물의 차이인데, 단지 요즘의 '헌금'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39절 '회당'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41절은 다시 '그리고 kai'로 시작하며 다른 상황이 전개됨을 말하는데, 소위 '성전 헌금함'을 말한다. 다시 말해 돈을 포함하지만 돈의 문제를 넘어 삶의 문제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요구하신다.
주님, 받은 것 만큼 누린 것 만큼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우리는 주님께 많이 받았음에도 많이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전부를 주신 주님께 우리 역시 전부를 드리기 원합니다. 오늘 시간도 어제보다 더 드리고 감정을 비롯하여 마음과 혼과 뜻과 생각과 힘 모두가 주님을 향하기 원합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페북 나눔:
주님께서는 단지 육적인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주' 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들었는데, '즐겁게'의 원어는 '헤데오스'이며 그 어원은 '헤도네'로서 성경 여러 곳에서 '쾌락'으로 번역되어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습니다.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소위 '헤도니즘'이 이 단어에서 파생했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를 짐으로 세상적 쾌락은 좇지 않지만, 주 안에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럴 때 진정으로 주께 전부 드리는 삶이 가능한데, 참된 기쁨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궁핍할지라도 (혹은 으로부터 에크) 그녀가 소유했던 모든 것 그녀의 삶 (원어 생명 비오스) 전부를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