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하나이신 에고 에이미 주님 (요 8:48-59)

주님께서 그들이 마귀의 자식들이라 폭로하시자 유대인들도 주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또 다이몬을 소유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시고 "나는 다이몬을 소유하고 있지 않소 그러나 나의 아버지를 공경하고 있소. 그리고 그대들은 나를 불공경하고 있소" 라고 다만 사실을 말씀하신다. 거짓말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선동당하는 것이지만 그에 대해 사실을 말하는 것은 이기는 것이다. 우리 말에 '귀신'이라는 말과 성경에서 말하는 '다이몬'은 매우 다른 것인데, '귀신'은 보통 죽은 사람의 혼백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지만, '다이몬'은 그 자체로 독특한 존재들이다. 물론 우리가 연상하는 '귀신'들의 일이 모두 이 다이몬들에 의한 것이라 그들이 사람들의 조상을 흉내낼 때 속기도 한다. 성경에서 '귀신이 들렸다' 라는 말은 13번 나오고 여기 처럼 귀신을 '소유'한다 라는 말도 꽤 많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바알세불에 지폈다 (막 3:22)'도 원어로는 바알세불을 '소유하고 있다'로 되어 있다. 귀신 들렸다 (daimonizomai)라는 말은 보통 중간/수동태로 되어 있어서 사람의 의지를 이기고 더러운 영이 지핀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은 그 이전에 '소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통 이 소유함은 능동태로 되어 있어서 이 다이몬을 원하는 이들이 소유하게 되고 또 그 후에는 지피게 된다.

유대인들은 성령에 충만하신 주님께서 다이몬을 소유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에 주님은 흔들리지 않고 '나의 아버지를 공경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공경하다'는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와 같은 말인데, 주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공경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을 불공경했는데, 그들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주님을 불공경한다고 말씀한다. 그 이유는 이미 말씀하셨듯이 그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니시며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50절은 원어로 '그런데 나는 내 영광을 찾고 있지 않소. 찾고 있고 심판하고 있는 이가 있소 (계시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뒤에 '찾고 있고 심판하고 있는 이'가 아버지를 말씀하신 건지 아니면 마귀를 말씀하신 건지 분명하지 않다. 여러 번역본에 '나를 위해' 라는 말이 삽입되어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지만 원어에는 그런 말이 없다. 이미 지난 5:22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여기 '(영광을) 찾고 있고 심판(혹은 판단)하고 있는 이'는 아마도 마귀를 의미하는 것 같다.

51절을 원어에서 직역하면 "아멘 아멘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소. 만일 누구든 나의 말을 지킬까 하면 세대 안으로 죽음을 결코 볼까 하지 않소." 정도가 되는데, 여기 '지키다'와 '보다' 모두 가정법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에 '만일'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지키면 본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제 우리는 당신이 다이몬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았소. 아브라함은 죽었소 그리고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리고 당신은 '만일 누구든 나의 말을 지킬까 하면 세대 안으로 결코 죽음을 맛볼까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소" 라고 마치 과거 옛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 했던 것 처럼 주님의 말씀을 잘못 말하는데, 그들이 듣고 싶은대로 들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지키다-보다'로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지키다-맛보다'로 변형시켰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9에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기록하는데, 주님 당신 조차도 죽음을 맛보셨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고 만일 살게 된다면 오히려 저주이다. 우리는 죽음을 '맛볼' 것이지만 그 죽음은 잠간이고 진정한 죽음 즉 마지막 불못에 던져지는 영적인 죽음은 보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비난에 주님께서는 계속 일일이 답하시는, 우리가 보기엔 답답한 모습을 보이시는데,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만일 그들이 정말 마귀의 자식들로 끝난다면 이렇게 길게 자세히 대답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후에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이 구원되어지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지만,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 중 몇은 나중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는 아마도 믿게 되지 않았을까? 사실 이러한 말씀은 당시 제자들이 듣기에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54절에 주님께서는 "만일 내가 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이는 나의 아버지시오. (그는) 그대들이 그대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분이시오" 라고 말씀하시는데, 50절의 '영광을 찾다 (구하다)'라는 말과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세상 사람들과 마귀는 영광을 '구하'지만, 아버지는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신'다. 이것이 세상 영광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는 영광의 차이다.

주님은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볼까하여 즐거워했소 그리고 (그는) 보았소 그리고 기뻐했소' 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본 것은 사실 이삭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눅 16장 거지 나사로의 예를 보면 아브라함은 주님 말씀 처럼 주님의 날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즉시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는 즉 낙원에 들어가는지 아니면 소위 '지옥'에 떨어지는지, 그게 아니라면 부활의 날까지 '자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주님의 날을 봤다는 것이고 또 기뻐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을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반발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아멘 아멘'으로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이 되기 전에 나는 이다 (혹은 있다)" 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이 되기 즉 태어나기 전에 주님께서 있었다 라는 말도 그들에게는 실족할만할 것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이었다' 혹은 '이어왔다'가 아니라 '이다'라고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하며 여기에는 특히 ego eimi로 분명히 말씀한다. 즉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앞에 (나는) 여호와라'는 의미다. 주님께서는 그 신성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항상 함께 하시며 그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8:26). 그래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신성모독으로 들릴 수 있는 주님의 이러한 말씀에 그들은 돌을 던지려고 돈들을 들었는데, 아직도 배경은 성전이다. 성전 안에 던질만한 돌들이 왜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단지 위협만하려고 돌을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성전에서 주님을 돌려 치려했을까? 그들의 이러한 폭력적인 모습이 그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드러내준다..

주님, 주님은 진리이시고 영광받으신 분이시기에 사람들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 그들을 위해 증거하셨음을 봅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주님 처럼 우리도 주님과 하나이기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감히 선포하며 지키며 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