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적 회복과 삶의 목적 회복 (요 9:1-12)

주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 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보셨는데, 그냥 지나치실 수도 있었지만 '주목'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궁금해서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그 사람의 범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들의 범죄 때문인지 물었다. 이러한 질문은 타당하게 들리는데, 그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 그의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기형아는 물론 아주 가끔 육체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성기 모두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는데, 그러한 경우 부모 특히 어머니가 임신 중에 잘못 약을 복용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우연히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사람들은 궁금하게 여긴다. 임신 중에 음주 흡연 혹은 마약 등을 했다면 분명 임산부의 책임이겠고, 혹시 방사선등의 영향이 있었다면 그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명확하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누구의 '범죄함'이 이유가 아니라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명백해지기 위함'임을 말씀한다.

'하나님의 일들'은 복수로 되어 있는데, 단수로서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 (요 6:29) 하나지만, 복수가 될 때는 이 믿음을 따르는 여러 '방법'들을 의미할 수 있다. 즉 앞서 말한 양성 모두의 성기를 갖고 태어난 이들은 과거에는 숨어 살거나 아픈 상처를 갖고 살아야만 했었겠지만, 이제는 원하기만 하면 유전자 검사를 바탕으로 성을 구별하여 간단한 수술을 통해 고칠 수 있다. 즉 이러한 기형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물론 주님께서는 공동체 즉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하기 원하실 것이다. 이 태어날 때 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에 대해서는 특히나 결론적으로 주님을 믿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며 그것이 바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명백해 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들을 (아직) 낮일 (때) 까지 일해야 하는 것이 우리를 요구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때 밤이 오고 있다 (4절)'라고 말씀하시는데, 무언가를 '하는' 것과 '일들을 일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하는' 것은 아무 때든 할 수 있지만 이 '일들'은 오직 낮에만 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할 수 없는 때 즉 밤이 오고 있고 주님께서 세상에 있을 동안은 주님이 세상의 빛이시라고 말씀하신다 (5절). 주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서 빛을 비추시며 '우리' 즉 주님과 제자들이 일들을 일할 수 있게 하시는데, 주님께서 더 이상 육신으로 계시지 않으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믿는 우리가 '빛의 자녀들 (엡 5:8)'로서 행하며 주님의 일들을 일한다. 단지 무엇을 '하는' 것은 뚜렷한 목적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일들'을 '일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 목적과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이제까지 일하시'고 주님께서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요 5:17).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일곱 째 날에 완성을 의미하는 안식이 있었지만, 그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는 안식이 사라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바로 그 일이며, 하나님의 '일들'은 그것을 위해 따르는 모든 방법들이다. '하늘들과 땅'의 '창조'가 있었고 천사들의 배역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심판이 따랐고 다시 '땅과 하늘들'을 '만드심 (회복)'이 있었는데, 또 다시 인간의 범죄가 발생했고 안식이 그쳤으며 그래서 다시 구속을 말씀하시고 4천년 전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2천년 전 주님께서 오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맹인으로 태어난 이를 고치신다. 그 방법이 흥미로운데, 보통은 말씀으로 병을 고치시지만, 이 사람에 대해서는 '땅으로 침뱉으셨다 그리고 그 침 밖으로 진흙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진흙을 그 눈들을 위에 그에게 덧바르셨다 (원어 참조)' 라고 기록한다. 이 흥미로운 기록은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던 것과 흡사한데, '흙'을 재료로 쓰신다. 흙으로 빚으려면 수분이 필요한데 주님의 침을 쓰셨고, 이 진흙으로 빚으셔서 그 사람의 눈들 위에 덧바르셨다. 헬라어에서 '무엇을 무엇에' 라고 할 때 모두 목적격으로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우리 말로는 자연스럽지가 못해서 '무엇을 무엇을' 이라 하지 않고 '~을 ~에'라고 하지만 원어에는 '그 진흙'이라는 말과 '그 눈들'이라는 말 모두가 목적격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 맹인의 눈들'에' 진흙'을' 덧바르신 것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라 눈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었던 그에게 진흙으로 '눈들을' 덧바르셔서 만들어 주셨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특히 이 '덧바르다' 라는 말은 '위에 epi'라는 전치시가 이미 앞에 있는데도 다시 epi가 접두사로 쓰인 epichrio 즉 '위에 (기름 등을) 바르다'라는 단어가 쓰였다. 주님은 아마도 이 맹인에게 새롭게 눈들을 만들어 주신 것 같다.

그냥 만들어 주시면 충분했을텐데 "가라 실로암의 못 안으로 씻으시오" 라고 명하신다. 여기에는 '죄'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죄사함 보다는 실로암이라는 말이 중요한데, "'실로암'은 '파송되었다'라 해석되어진다"라고 설명했다. 이 '파송하다'라는 말은 단지 '보내다'라는 말보다 공식적인 어감이 있어서 '사도'라는 말과 연관되며,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을 떠오르게 한다. 주님께서는 이 맹인에게 주위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물이 아닌 반드시 실로암에 가서, 특히 실로암 '안으로' 씻으라 명하시는데, 그는 맹인으로 태어나 삶에 목적이 없었지만, 이제 눈이 열리면서 '파송' 즉 삶의 목적이 생긴다. 그가 가서 씻자 보게 되어 (돌아) 왔다 (혹은 갔다).

보지 못하던 맹인이 보고 나면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전에 없던 '눈빛'이 생기고 자신의 몸을 돌볼 수 있게 된다. 8-9절은 '그래서 이웃들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고 있는 이들이 말했었다 "이 (자)는 앉게되어 구걸하는 이가 아니냐?" 몇은 "이 (자) 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몇은 "아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자)는 "나는 (그자) 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라고 기록한다. 이 사람은 완전히 변했다. 사람들의 질문에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예수'라는 이름은 알았지만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지는 알지 못했다.

주님, 구원받고 사명받은 저도 일하게 하소서. 썩을 것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영생 안으로 목적을 갖고 주님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그러한 영광과 기쁨을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