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볼 수 있기 까지 변화되는 눈 (요 9:13-34)
이 태어날때 부터 맹인이던 사람에 대해 왜 이렇게 길게 요한은 기록하고 있을까? 이 기적 자체도 놀랍지만 이는 단지 하나의 신기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의 어떠하심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을 드러내며 그가 창조주이심을 밝혀 주는데,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인 주님은 볼 수 있었지만 세상의 빛으로서의 주님은 볼 수 없었다. 창조 (혹은 회복) 첫째 날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눈이 없는 혹은 눈에 문제가 생긴 사람에게는 그 빛이 보이지 않는다. 즉 이 '보는' 문제는 중요한데, 그래서 1절부터 주님께서 이 맹인을 '보셨다'라고 기록한다. 사람은 정상적인 눈을 가지면 사물을 보며 인식할 수 있지만, 이는 소위 '가시광선' 스펙트럼 안으로 제한된다. 빛 전체의 스펙트럼 중에 가시광선이 차지하는 비율은 정말이지 작아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영역은 미미한데, 그래서 이 '보는' 문제는 사실 육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 혹은 시력에도 적용된다.
한때 맹인이던 이 사람을 그의 이웃들은 바리새인들 앞으로 데려간다. 이들도 잘 믿지 못했지만 바리새인들 역시 그를 보고 과거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마도 주님께서 그의 시력만을 회복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두 눈들 역시 매우 아름답게 만드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반적인 맹인이라면 낫게 되어도 두 눈이 흐리고 혹은 보기에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지만, 아마도 이 사람의 눈은 빛이 나고 또릿또릿하게 힘이 있어 보였을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창조 혹은 회복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단지 지옥 신세 면하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주님의 일하심은 흐리멍텅하게 보이는 눈들을 그대로 두시고 시력만 조금 회복하시는 것이 아니다. 지난 9절에 이 맹인이던 이는 '"나는 (그자) 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라고 기록하는데, 여기 '나는 (그자) 이다' 부분은 ego eimi 인다. 주님 외에 이런 말을 하는 이는 아마도 요한 복음에서는 이 사람 한명 뿐일 것인데, 사도 바울도 이러한 말을 자신에 대해 썼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나는 이다'라고 지금 이 사람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모양과 형상을 인간에 적용하신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서 그 분을 땅에서 (혹은 온 우주에) 표현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사람이 타락하자 이것은 불가능해졌지만, 하나님의 구속은 그렇기 때문에 단지 죄사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은 후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을 닮아서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벧후 1:4). 사도 바울도 구속 혹은 구원에 대해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기록하는데, 역시 '보는' 문제를 언급하며,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그때에는 우리 얼굴과 주님의 얼굴이 서로 대하여 볼 것을 말씀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닮도록 회복되고 변화되지 즉 성화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에 대해 종교인들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을 수도 없었다. 과거 율법에 기록한 것을 지키기에 급급했지만 그 '본래(마 19:8)'의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여호와께서 왜 이 안식(일)을 지키라 주셨는지 아는 대신에 단지 '법'으로 지키려 했는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 아가페 사랑이고 율법 즉 '그 법'은 그 후에 온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닮는 다는 것, 혹은 하나님 같이 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신성모독으로 여겼는데, 과거 옛 뱀이 했던 거짓말 때문이다. 사탄 마귀는 이렇게 원래 하나님께서 뜻하셨던 신성한 것을 교묘하게 왜곡시키는 것에 능하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원래부터 하나님 같아서 '인류'가 아니라 '신류'였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하나님 같은 것에서 벗어나 선악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독립해서 하나님 같아 질 수 있다는 유혹과 거짓에 속아 넘어갔다. 그 원리는 지금도 동일한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생명 없이 목숨을 영원한 이어가기 위해 지금도 소위 생명 공학이란 것에 몰두하고 있다. 생명은 생명에서만 오고 하나님의 생명 만이 영원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같이 만드신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도 같은 대답을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이 그는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여기는지) 묻자 그는 "(그는) 선지자 입니다"라고 답한다. 이 사람은 기적은 경험했어도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다. 우리도 우리가 알지 못한 때에 이미 구원을 받았었을 수도 있는데, 우리의 구원은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지식에 까지 자라'며 새롭게 되어야 한다 (벧후 3:18, 골 3:10).
이미 그의 부모를 불러서 말하게 했지만 출교를 두려워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이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으라고 그의 부모는 말했는데, 그에 비해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그러한 두려움에서 자유하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든 그(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출회자가 될 것을 공동결의'했지만 이 맹인이었던 자는 고침은 받았어도 아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분명히 알았던 은 전에는 맹인이었지만 '지금은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31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가득한 (이들의) (말)을 듣지 않으시지만, 만일 누구든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리고 그의 뜻을 하고 있(다면) 그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1절에서 주목해 보신 것은 당시 여러 다른 맹인들도 있었지만 그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분명 죄인을 향한 주님의 은혜는 있고, 이는 주님의 긍휼하심에 바탕을 두지만, 보지는 못했어도 그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고 그의 뜻을 따라 살려 노력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주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이들에게는 구속의 은혜가 내릴 수 없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회개가 필요하다.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둘 있었는데, 주님이 '죄가득한 사람임 (24절)'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29) 것이었다. 하지만 주님에 대해서는 잘못 알았었고, 정작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주님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모세를 말하면서 주님이 어디로부터인지 몰랐다는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그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는 신기한 (혹은 의아한) 것이었는데, 종교지도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정작 자신이 경험했던 신비한 사실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께서 "내 눈들을 열었다는 것 (30절)' 이었다. 따라서 그는 만일 이 (분)이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었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33절)" 라고 증언한다.
주님, 우리가 알고 있다고 또는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구원하시고 진정 주님을 보며 알게 하소서. 주님이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볼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루 하루 조금씩 더 보게 하셔서 그 날 주를 만날 때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