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이미 본 영적인 시각으로 신앙을 확언함 (요 9:35-41)

35절은 '예수께서 그들이 그를 밖으로 내쳤다는 것을 들으셨다 그리고 그를 발견하셔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그 사람의 그 아들 안으로 믿고 있소?"' 라고 되어 있다. 그가 내쳐진 것을 들으신 후에 주님은 그를 '발견'하셨는데, 이 단어는 '찾다' 와는 다른 말로, 마 7:7에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라고 되어 있는데, 뒤의 '찾아내다'가 바로 이 '발견하다'이다. 즉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찾'는 것이 필요한데, 주님께서는 그냥 길을 가시다가 어쩌다보니 이 사람을 다시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먼저 '찾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를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그를 찾으셔야 했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아담이 범죄한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주고 혼내려고 찾으신 것이라기 보다는 찾아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신다.

주님의 '그 사람의 그 아들 안으로 믿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여, 그가 누구 입니까 (그래서) 그 안으로 (내가) 믿겠습니까?"라고 되묻는다. 그는 과거 주님의 음성을 듣기는 했지만 주님을 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고쳤다.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 사람의 그 아들 안으로 믿고 있'는지 물으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신약 여러 곳에서 그렇게 기록하지만 정작 주님은 당신 자신을 '그 사람의 그 아들'로 말하셨다. 여기 '그 사람'은 피조물 '인간'을 뜻하고 '그 아들'은 어떤 '한 아들'이 아닌 정관사가 붙은 바로 '그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구 중에 대부분 정관사가 생략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그 아들'이라는 문구도 있는데, 정관사 없이 그냥 '아들'로 된 곳이 다수이다. 더우기 롬 8:19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도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그 아들' 즉 독생하신 한 분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까지 성장하는 많은 이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아들들, 원어 참조 마 5:9)'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그 사람의 그 아들'이라는 문구는 매우 중요한데, '의'라는 말이 소유격을 의미하지만, 원어에는 단어 자체가 '소유격'으로 되어 있어서, 그럴 때는 앞의 말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the City of Los Angeles 라는 말이 '엘에이의 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엘에이 라는 시'라는 말인 것 처럼, '그 사람의 그 아들'은 '그 사람이라는 그 아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주님은 '그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성육신 하심으로 '그 사람' 즉 인간이 되셨다. 그래서 37절은 주님께서는 흥미롭게도 당신 자신에 대해 1인칭으로 말씀하지 않고 "그대는 그를 보기도 했소. 그리고 그대와 함께 말하고 있는 이, 그 이오." 라며 3인칭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 사람 앞에서 말씀하시지만, 주님의 원래의 볼 수 없는 그 모습은 바로 '그 아들'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는 아직 주님을 보지도 못했지만 사실은 '그를 보기도 했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봄'은 영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눈으로 보기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그래서 소위 '성화'라는 그림들로 주님의 얼굴을 묘사하거나 또는 주님의 모습을 조각하기도 하지만, 사도 바울은 '..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6)'라고 말하며 그러한 행사가 모두 헛것임을 말한다. 요한 역시 계시록에서 이 땅을 다니시던 주님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의 주님을 증거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내가) 믿습니다, 주여' 라고 확언했었다 그리고 그에게 절했다" 라고 기록한다 (38절). 그는 음성만 들었지만 사실은 주님을 영 안에서 보았다. 그래서 '고백'을 지나 '확언하다'라는 말에 가까운 phemi를 했다. 그리고 주님께 절했는데, 이 '절하다'라는 말은 proskuneo로 한글 성경에는 거의 모두 '예배하다'로 번역된 말이다. '예배'라는 말 자체가 '예를 갖추어 절하다'는 말이지만, 보통 공동 모임 집회라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말로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주님께 절하며 섬기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이 참된 '예배'이다 (지난 요4장에서 설명했음).

39절 번역이 좀 잘못 되어 있는데,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심판 안으로 내가 이 세상 안으로 왔소. 보지 않고 있는 이들이 보도록, 그리고 보고 있는 이들이 맹(인)들 되도록." 정도가 된다. '심판하러' 즉 동사는 없는데, 앞서 5:22에도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또 12:47에도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기록되었다. 앞으로 재림 때에는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실 것이지만 적어도 주님의 처음 오심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다. 그래서 사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 받으셨는데, 그것이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주님의 오심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그리고 보는 이들은 보지 못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이에 대해 "우리도 맹(인)들이다 (라는 것) 아니오?" 라고 묻자 주님께서는 "만일 당신들이 맹(인)들 이었더라면, 죄를 소유하지 않았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 (당신들은) (우리는) 보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소. 당신들의 죄가 머물고 있소." 라고 답하신다. 이 '보는' 문제와 '죄'가 연관된 것을 알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죄는 어떤 나쁜 것을 행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적인 시각이 없어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어도 자신들은 볼 수 있다고 여기며 자만하는 이들은 영적 맹인들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 모르는 것을 안다고 또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거짓말 하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 안으로 믿었음으로 주님을 본 것임을 알기 원합니다. 주님은 실로 그 사람의 그 아들, 사람이신 아들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