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을 통해 드나들며 지나치게 소유하게 될 주님의 그 생명 (요 10:1-10)

10장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즉 '아멘 아멘'이라는 문구가 1절과 7절 2번 나오고 '나는 이다, ego emi 역시 9 11 14 절에 계속해서 나온다. 주님은 9절에 의하면 양의 문이시고 11, 14절에 의하면 '좋은 목자'시다. 주님께서는 여호와 라는 이름 처럼 모든 좋은 것의 '나는 이다'시지만 여기에서는 유독 두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바로 '목자'이시면서 '문'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양들'을 위해 있다.

양들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우리 안에 있는데, 이 우리는 안식과 보호를 위해서다. 그런데 풀 즉 꼴을 먹기 위해서는 나가야 하고 그 후에는 또 다시 그 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문을 통과해야 한다. 목자 또한 반드시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둑들' 혹은 '강도들'이다. 또한 12절에는 목자의 모습은 있지만 양들을 위하지 않는 '삯꾼' 역시 존재함을 말씀한다.

주님은 '그 문'이신데, 그를 통해 먼저는 유대민족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우리 안에 들었다. '우리' 라는 말은 원래 '뜰' 혹은 '마당'을 의미 하는데, 그 외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있고 후에는 이 둘이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을 것을 말씀한다 (16절). 하지만 여기는 우선 구약을 바탕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원래 '그 법'을 준수함으로 인해 그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언약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그 법' 즉 율법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 있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그 문'이신 주님 자신이시다. 이 '그 문'을 통하지 않고 다른 것 즉 인간의 전통이나 율법을 행함으로 넘어 들어가는 이들은 도둑이며 강도고 그들이 노리는 것은 양들이며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이다 (빌 3:19).

3절은 '그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있소 그리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소. 그리고 (그는) 자기만의 양들을 이름을 따라 소리내고 있소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 내고 있소 (원어 참조)'라고 하는데, 목자가 그 문을 열거나 혹은 그 문 자체가 자동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있어서 그 문을 열어준다고 말씀한다. 주님은 그 문이시고 그 목자이시지만, 양들이 주님을 통해 목자에게 오려면 '그 문지기'가 있어서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 문지기를 '성령' 혹은 '모세' 혹은 '침례자 요한' 이라는 등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그 문을 열어주는 주체는 과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이라 본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그 언약에 기반한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륜이라 생각할 때, 주님은 구약에서 계속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준다.  주목할 것은 '이름을 부르다'라고 여러 번역본에 나오지만 보통 '부르다 kaleo'가 아니라 '소리내다, (동물들이) 울다, 부르다, 외치다' 등을 의미하는 phoneo라는 단어가 쓰였다.  '이름을 따라' 부르려면 '부르는' 것이 필요한데 '소리내다'라고 한다.  많은 번역본에서 '양의 이름'이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양의' 라는 말이 없고 이 '이름'은 단수이다.  많은 양들이 있지만 단수의 이름을 소리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목자가 그 많은 양들에게 각자 이름을 하나씩 부르지는 않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각 양의 이름이 아니라,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아는 것인데, 따라서 단수의 그 '이름'은 주님의 이름이라는 생각이다.  즉 주님께서는 양들에게 '나는 이다' 혹은 '예수라'고 외치시고 있으며 그분의 양들은 그 음성과 이름을 알아 듣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그만의 모든 (양들)을 내몰았을 때, 그들의 전방에 가고 있소 그리고 양들은 그를 따르고 있소.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았기 때문이오'라고 4절은 기록하는데, '내몰다'라는 말이 '인도하다'라는 말 보다는 다소 부드럽지 않게 들린다. 양들은 쉼과 보호가 있는 우리 안에 안주하기 원하지만 꼴을 얻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고, 기꺼이 하지 않을 때 양들을 내몰아야 한다. 과거 '구약'에, 특히 그 본래의 것을 잊고 단지 율법의 '행위'에만 묶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된 '꼴'을 먹이려면 그 '우리'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럴때야 비로소 전방에 가시는 목자이신 주님을 그 양들은 따르게 된다.

그런데 아마도 그 우리 안의 모든 양들이 다 나오지는 않는 것 같다. 4절에 '그(만)의' 라는 말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의 목소리를 아는 것'이 필요했고, 따라서 다른 자는 따르지 않는다 (5절). 즉 주님의 양들이 아니면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고 잘못 따르게 될 주님께 속하지 않은 양들이 있을 것도 암시하시는 것 같다.

이러한 말씀에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주님은 다시 또 말씀하시는데, "나는 그 양들의 그 문이다" 즉 ego eimi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주님께 속한 '그 양들'의 그 통과하는 '그 문'이시다. ego eimi를 여호와라고 한다면 마치 '여호와 이레' 처럼 주님은 '여호와 양들의 문'이시다. 그런데 '그 문'이시기에 유일한 문이시며, 또한 유일한 '그 목자'이신데, 그래서 "누구든 나의 앞에 온 모두는 도둑들 그리고 강도들이오. 그러나 그 양들이 그들을 듣지 않았소"라고 말씀한다.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은 은혜이며 감사한 것이지만, 주님의 (소유격, 원어) 앞에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순위 면에서나 주님을 앞선 것들은 모두 도둑들이며 강도들이다. 이것은 율법도 포함하는데, 죄인들에 대한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고 (롬 3:20), 죄로 심히 죄되게 함으로 (롬 7:13) 심판 받게 하는 것이다. 또한 주님 오시기 전 약 400년 동안의 공백기에 나타났던 여러 자칭 '선지자들' 혹은 민족 지도자들 등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9-10절은 놀라운데, 다시 주님은 "나는 그 문이다" ego eimi를 말씀하시며 "나를 통해 만일 누가 들어오면, (그는) 구원되어질 것이오 그리고 들어올 것이오 그리고 나올 것이오 그리고 꼴을 발견할 것이오"라고 말씀한다. 여기 '들어오다 eiserchomai'라는 말이 두번 나오는데, 이 문을 통해 '바깥'과 '우리'를 드나든다. '들어오면' '구원되어질 것'인데, 즉 이 말은 '구원'이 16절의 '한 무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그 안으로 들어와 주님의 백성인 새로운 '한 새 사람'에 속하게 되었다.

한글 번역에는 보통 '들어가며 나오며'로 되어 있는데, 원어로는 eis+erchomai, ex+erchomai로 '안으로 오고(혹은 가고)' 또 '밖으로 오고(혹은 가고)'로 되어 있다.  '그 문'이신 주님을 통해 우리는 안으로든 밖으로든 그분께로 '오는' 것이다. 그 분을 통해 쉼도 얻고 꼴도 얻는데, 궁극적으로 주님께서는 믿는 우리들이 "생명을 소유하도록 그리고 지나치게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 '풍성히'로 번역된 perissos라는 말은 고후 10:8 '..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에도 쓰였는데, 사실 '풍성한' 것은 필요에 딱 맞춘 정도가 아니라 필요 이상 지나치게, 넘치게 주신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 오셔서 우리가 주님을 소유하지만 어떤 면으로 그 '양'은 미미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오고 또 밖으로 오며 꼴을 계속해서 얻을 때 우리는 생명을 소유하는 것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하게 넘쳐 우리가 필요한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그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주님, 이러한 주님의 약속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며 경험되어지기 원합니다. 우리의 누림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경험됨으로 진리이심이 증거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세에 주님의 말씀이 진리이심을 밝히 드러내소서. 그 문을 통해 오늘도 들어오며 나오기 원합니다. 그 꼴을 얻고 누리고 구원되어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