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장을 따라 목(회)자들은 자신의 혼을 항상 내려놓는 삶을 살아야 함 (요 10:11-21)
주님은 좋은 목자이신데, 그래서 그 목숨을 양들을 위해 버리신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 목숨을 버리실 것이지만, 좋은 목자로서 현재 그 목숨을 버리고 계신다. 죄인들을 위해 언젠가 죽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좋은 목자'로서는 양들을 위해 항상 '목숨'을 '놓아두고 있는' 것이 필요한데, 요한복음에서는 이제까지는 '생명 zoe'라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다가 처음으로 이 psuche라는 말이 쓰인다. 이 단어는 우리 말로는 '목숨, 혼'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일상 생활에서 숨이 붙어사는 '명줄'이나 우리 생각에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의 '육신'은 항상 '영'을 대적하는데 (갈 5:17), 영과 육 사이에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혼도 역시 타락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 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후에 25절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이 '목숨' 즉 psuche에 대해 말씀한다. 또 히 4:12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라고 기록하며 우리의 혼과 영이 섞여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러 쪼개야 함을 암시한다. 주님 역시 인성을 지니신 사람으로서 자신의 판단대로 사실 수 있었지만 그러한 혼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놓아두고' 사셨는데 이것이 바로 양들에 대한 좋은 목자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삯'에만 의해 일하는 사람이고 또 양들도 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늑대가 오면 양들을 그냥 놓아 보내고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망간다. 흥미롭게도 이 '놓아 보내다 aphiemi'라는 단어는 '보내다, 놓아주다, 허락하다, 용서하다, 해방하다' 등을 의미하는데, 양들이 마음대로 가도록 하는 것은 결국 늑대 밥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늑대는 양들을 낚아채고 또 흩어 버린다 (11-12절). 여기 '삯꾼 misthotos'은 '고용하다 misthoo'라는 말에서 온 단어인데, 이 말은 또 '삯' 혹은 '상'으로 번역된 misthos에서 왔다. 주님께서도 '하늘의 상'을 말씀하셨고 성경 여러 곳에서도 이 '상' 혹은 '대가' 혹은 '삯'등에 대해 정당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여기 문제는 양들의 생명을 지키는 목자냐 아니면 삯만을 바라는 삯꾼이냐에 대한 것이다. 목회자들이 정당한 사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소위 양들에게서 털과 젖과 고기 등을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삯꾼의 소리다. 좋은 목자는 먼저 양들을 푸른 초장에 인도함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그리고 오직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과 일상의 전부를 놓아 둔다.
주님께서 좋은 목자로서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양들을 위해 버리실 수 있는 이유는 14-15절에 나오는데, 바로 '아는 것' 특히 양들을 아시고 양들은 주님을 알며, 또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아시고 하나님은 주님을 아시기 때문임을 말씀한다. 목회자나 선교사나 그 누구든 소위 '소명'을 받은 이들은 신학을 했다거나 특별히 능력이 있다거나 혹은 대단한 카리스마로 목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리고 주님을 아는 것, 특히 계속 '알고 있는 (현재 진행형)'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관계'인데, 이러한 관계가 분명하고 살아 있으면 세상에서 중요시 하는 것들에 대한 열등감을 초월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중요시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빌 3:8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고백했다.
16절에는 '다른 양들' 즉 이방인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소유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방인들에게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도 않았지만 시간을 초월하시는 주님에게는 이미 그 다른 양들도 소유하신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도 데려오는 (것이) 나에게 요구하고 있소"라고 꽤나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그들은 "나의 그 목소리, (그들이) 들을 것이"기 때문이고, 결국 이방인과 유대인들은 '한 새 사람'이 되어서 "한 무리 한 목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들을 대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들을 너무 특별히 혹은 높이 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목자를 섬기는 '한 새 사람'이기 때문이다.
17절은 "이를 통해 아버지께서 나를 아가페하고 계시오. 내가 그것을(목숨) 다시 받으려고 내 목숨을 놓아두고 있기 때문이오 (원어 참조)"라고 하시는데, 아버지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아가페로 정의되신다 (요일 4:8, 16). 하나님은 모두를 아가페 사랑하시고, 그래서 독생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지만, 특별히 주님을 아가페 사랑하시는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다시 받으려고 그것을 놓아두고 있기 때문임을 말씀한다. '놓아두고 있'는 것은 계속해서 현재진행형 즉 삶 자체를 말씀하지만, '다시 받다'는 아오리스트 가정형으로 되어 있다. 이 '받다 lambano'는 '받다, 얻다, 취하다' 등의 의미가 있는데, 많은 번역본에서 '얻다'로 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 '받다'가 더 좋은 이유는 능동태임에도 먼저 '놓아둠'이 요구되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시 목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얻다' 혹은 '취하다'로 번역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주님은 이렇게 목숨을 놓아두거나 또 다시 받을 것에 대해 '권세'라고 말씀하시는데 (18절), 우리에게는 이러한 권세가 없다. 오직 주님만이 그러한 명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기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위해 죽는다 해도 그것이 대속의 죽음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주님을 따름으로 일상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절하는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의 '혼'을 계속해서 놓아 두어야 한다. 주님께서 이미 구속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좋은 목자이신 주님을 많은 목자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혼을 내려놓는 삶으로 따를 수 있게 하소서. 그래서 양들을 온전히 인도할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이 보이신 것 처럼 양들을 위해 항상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주의 종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베푸심이 충만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