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관계(요 10:22-30)

때는 '수전절' 혹은 '성전 봉헌절'으로 바뀐다. 히브리어로는 '하누카'라고 하는 이 절기는 율법에 명시된 것은 아니고 이방에게 더렵혀졌던 성전을 깨끗이 하고 다시 봉헌하는 기념일로 8일동안 계속 되던 때이다. 요즘도 보수 유대인들은 12월 크리스마스 1-2주 전에 이 하누카를 기념한다. 따라서 이 절기는 성전을 '새롭게 다시 봉헌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성전 안 솔로몬 주랑 안에 걷고 계셨었다. 보통은 말씀하셨었지만 이 때는 한가롭게 걷고 계셨는데, 유대인들은 주님을 둘러싸고 "언제까지 우리의 혼을 들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말하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가) 당신들에게 이미 말하였소 그리고 믿지 않고 있소. 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내가 하고 있는 그 일들, 이것들이 나에 대해 증언하고 있소 (25절)"라고 답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는데, 정치적 카리스마가 넘칠 것이라 예상하며 기대했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주님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힘과 권력 그리고 군사력 등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양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그들로 믿을 수 없게 했다.

그럼에도 주님은 계속해서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이러한 말씀과 또한 '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내가 하고 있는 그 일들'은 모두 주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그 일들'은 이어지는 구절에 나오는데, 27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알고 있'고 또 그들은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며, 28절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있'고 따라서 그들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그 누구도 주님 손 밖으로 빼앗아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말씀은 '관계'를 의미하는데, 그 시작과 주체는 주님이시지만,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의 양들인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또 주님이 이끄실 때 우리는 그를 '따르고 있'으며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실 때 지금도 주님으로부터 그 생명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만유보다 크신 분이면 하나님이신데, 그 분이 주님의 아버지시고, 주님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을 수 없듯이 '아무도 아버지의 손 밖으로 빼앗고 있을 수 없소'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30절). 이 '하나'는 '같다'라는 의미보다는 다시 '관계'를 의미한다. 주님은 삼위중 두번째의 '아들 하나님'이신 '성자'이시지만,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이 섞여 있다는 의미는 아니고 따라서 삼위는 '구별'되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이 아버지가 되었다가 아들이 되었다가 또 성령이 된다는 소위 '양태론'은 문제가 있다. 서로 다른 인격체를 갖고 계시지만 '하나'이신데, 하나님은 '세 분'이시고 이 셋은 '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신비다. 이러한 신비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되며 믿는 우리들 간에 하나되게 한다. 이미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임을 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이 하나됨을 지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