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병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냄 (요 11:1-16)

'병든'으로 번역된 asthenon이라는 단어는 우리 말로는 형용사이지만 원어는 동사다. 그것도 능동태로 되어 있어서 '연약해하는' 정도가 된다. 병이 들고 아픈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수동적인 문제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결과일 때가 많다. 인간의 본래 연약함의 시작이 선악지식의 나무를 먹은 것에서 유래하는데, 따라서 연약함은 인간의 선택이었다. 이 아픈 사람은 '라자로'였는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로 그 이름은 히브리어 '엘라자르'에서 왔고 '하나님이 도우셨다'라는 의미다. 이 이름은 '거지 나사로'와 동일한 이름인데, 하나님이 도우셨음에도 이 나사로나 거지 나사로나 모두 연약하거나 거지였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육은 무익하'고 '살리는 것은 영'이다.

2절은 '그런데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바르고 그의 발들을 자기의 머리털로 닦아내었던 이었다'라고 하는데,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바른) 사건은 다음 12장에 나오지만 미리 이렇게 말하는데, 요한 복음은 시간에 따르기 보다는 표적을 통해 주님의 어떠하심을 증거하는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오라버니 라자로가 아팠기 때문에 주님께 사람을 '파송'했는데,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위치를 알았다면 '보냈다'라는 말을 썼을 것인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파송하셨을 때도,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도, 하나님 아버지도 주님도 그들에게 정확한 목적지를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다만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땅 끝까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소명받고 파송받은 이들의 특징이다.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제자삼기 위해 가야할 것을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계속 가야 하며 그 정착지는 주님을 만날 때 까지 이다.

"주여,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연약해 하고 있습니다 (3절)" 이라는 전갈에 주님께서는 이 연약함(병)이 '죽음까지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그 하나님의 그 아들이 영광되어질까 함이다'라고 답하신다. 병 혹은 연약함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있어 그러한 것들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연약함을 고침으로 영광을 드러내시는 도구로 쓰시는데, 여기에는 특별히 '그 하나님의 그 아들'로 되어 있다. 병을 고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일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죽어서 사흘된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병'이 특별히 라사로 개인에 대한 '이 병'이 아니라, 원어에는 정관사가 붙어서 '이 그 병'으로 되어 있다. 즉 나사로의 병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병과 연약함을 가리키시는 것인데, 사람이 늙고 병드는 것은 원래 그렇게 되서 그런것이 아니라 죄로 인함이고, 죄는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병들이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연약함과 병들은 그 원인을 생각나게 하고 이는 병을 고치시고 생명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5절 기록은 흥미로운데,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르다를 그리고 그녀의 자매를 그리고 나사로를 아가페 사랑하셨다'로 되어 있다. 주님은 그들 셋 모두를 사랑하셨고, 여기에는 위 3절의 phileo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이며, 그들을 한데 묶어서 모두 다 사랑하셨다고 하지 않고 '마르다를 그리고 그녀의 자매를 그리고 나사로를'이라고 각자 열거하신다. 이 세상 그리고 역사적으로 수백억이 넘는 영혼들이 왔다 갔고 살고 있으며 또 앞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지만, 주님의 사랑은 그의 백성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다.

6절은 이상하게 '그래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논리적으로라면 '그런데' 혹은 '그러나'가 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 '그래서'는 앞 아가페 사랑과 연결되는데, '(아가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가) 아프고 있다고 들으셨던 때에도, 그 때 (그는) 계시던 곳 그 안에 두 날들을 과연 (더) 머무르셨다'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께서는 셋 모두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다. 따라서 이 '아가페' 사랑은 우리가 이해하는 사랑과는 다르다. 아마도 병에서 낫는 체험보다는 사망에서 다시 살아나는 체험이 더욱 놀랍고 값진 체험이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병에서 고침 받아도 어차피 한번은 죽는다. 라자로에 대해 그 후의 일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다시 죽었을 것으로 보통 생각하는데, 하지만 사실 모르는 일이다. 마 27:52-53은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라는 의아한 말씀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다시 유대로 가자는 말씀에 제자들이 걱정하자 주님께서는 "열두 시간들이 낮(의 것) 이지 않은가? 만일 누구든 낮 안에 걷고 있으면 앞으로 걸리게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빛을 (그가)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누구든 밤 안에 걷고 있으면 앞으로 걸리게 한다 그 안에 빛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9-10절, 원어참조)" 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시간이든 로마시간이든 낮을 12 부분으로 나누었다고 하는데, 낮일 동안에는 12개의 충분한 시간에 걸쳐 햇빛이 비춘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계심으로 아직은 영적으로 낮일 때 주님께서 그들의 빛 (세상의 빛)이 되시기 때문에 그들이나 주님은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라사로는 "잠에 빠졌다 (11절)". 이 동사는 수동태인데, 연약해 하는 것은 능동태이지만, 그 결과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사망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깨우러 (나는) 가게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깨우는' 혹은 '일으키는' 혹은 '살리는 (생명주는)' 일은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하시는 일이어서, '가는' 것은 수동태가 된다. 제자들은 이에 대해 "주님, 만일 그가 잠에 빠졌으면, 구원되어 질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제자들 생각에 잠에 빠진 것은 '연약한' 것과 관계가 있어서 이제까지 주님의 능력으로 보아 충분히 '구원되게' 즉 낫게 하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라사로의 죽음을 가리키신 것이고 14절은 '공개적'으로 라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그리고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아서 (너희들이) 믿을 수 있으니 너희들을 통해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자 (15절)'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마도 주님과 생긴 것이 닮아서) '디두모(쌍둥이)라고 불려지는' 도마는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한다. 앞으로 어떤 일을 보게될지 모른다.

주님, 인생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두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심을 부인하려 하지만 결국 그러한 모든 것들은 오히려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함을 봅니다. 죄와 사망에서 어쩔 수 없이 죽어가는 것에서 벗어나 주님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오늘도 곳곳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던 명령과 권세와 권위를 오늘 주의 종들에게도 충만히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