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순종 감사 역사 (요 11:38-44)
앞서 37절에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비야냥 거렸는데, 38절은 '그래서' 라고 이어진다. 이 '어떤 이'의 말에 ' 예수께서 다시 그 자신 안에 비통해지시면서 무덤 안으로 가셨'는데, 주님께서는 일부러 라자로에게 오는 것을 지체하셨기 때문에 마르다 처럼 '좀 더 일찍 와서 고쳐주면 죽지 않았을 걸..' 이라는 후회나 또 이 '어떤 이'의 푸념 때문에 '다시 그 자신 안에 비통해지'신 것이 아니었다. 앞서 눈물을 흘리신 것 처럼 이 비통해 하심은, 인간들이 죄와 사망에 묶여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의 무력함과 그에 대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는 이들에 대한 모습 때문이었다.
라자로가 죽어서 뉘어진 곳은 유대식 동굴 무덤이었고 그 입구를 돌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돌을 가져가시오" 즉 돌을 옮기라 말씀하신다. 그러자 마르다가 "주님, 이미 (그는) 악취내고 있습니다 나흘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에 주님께서는 "(내가) 그대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대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는) 볼 것이다'라고?" 하며 물으셨는데, 여기 '믿다'는 아오리스트 가정법으로 되어 있어서 마르다는 사실 지금 믿지 않는 상태이지만, 주님께서는 일방적인 은혜로 마르다를 믿음으로 이끄신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우리의 믿음은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우리 자신의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믿음 자체는 원래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것에서 '주님의 믿음'으로 까지 나아가며 성장해 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돌을 옮겼는데, 그러자 주님께서는 눈을 들어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다 (41절). 흥미로운 것은 '믿음'을 말씀하고 그 믿음의 증거로 그들은 그 가로놓였던 돌을 옮겼는데, 이 '옮기다'의 원어는 '가져가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동일한 단어가 '눈을 들다' 즉 '그의 눈들을 위로 가져갔다'에서도 쓰였는데, 돌을 옮기자 주님은 그 눈들도 위로 옮기신다. 그리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 후 라자로를 명하여 나오게 하신다. 믿음의 역사에는 이런 순서가 있는데, 먼저 믿음이 있고 (혹은 믿음을 주시고, '가정법') 그에 따른 순종이 있으며, 아버지께 감사드림이 있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역사가 나타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나를 들으셔서 당신께 감사합니다. 나는 그런데 당신께서 항상 나를 듣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러선 무리를 통해서 (위해서) 당신이 나를 파송하셨음을 믿게 하려고 말했습니다 (41-42절 원어 참조)" 라고 말씀하시는데, 보통 '기도'라는 것이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구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은 '간구'에 해당하고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주님께서는 감사 즉 아버지께서 주님을 파송하신 목적을 다시 한번 고백하시고 그에 따라 일하신다.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나는 신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항상 아버지 하나님을 찾고 감사드리고 영광돌리셨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자기의 의지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파송하셨음을 다시 말씀하신다.
43절은 '그리고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밖으로 (이제) 오라!"' 고 되어 있는데, '(이제) 오라'로 개인적으로 번역한 말은 deuro라는 단어로 신약에 단 9번만 나오는 특이한 말이다. 보통 '오다'라는 말은 '오다' 혹은 '가다'를 의미하는 erchomai라는 말을 쓰지만 이 deuro는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다 팔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과 계 17:1, 21:9 등에 쓰였다. 그래서 이 단어의 특이한 점은 '이제 여기로' 즉 다른 차원으로 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이생에서 전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님께서는 라자로에게 '이제 여기로 밖으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라자로가 죽어있던 나흘 동안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데, 그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있던 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명령은 원형이면서 명령으로 이해하는데, 보통 명령어에는 시제가 붙지만 원형으로 되어 있어서 시제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나아오시오 (아오리스트)'나 '나오고 있으라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그냥 '나오다'를 명령하는데, 시간을 초월한 아오리스트 시제까지 생략되어 부활이 어떠한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후에 부활되어 영원히 사는 것은 주님처럼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 우리가 현재는 이해하기 힘든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마지막 날들에 나팔 소리를 듣고 우리는 변화되어 낚아채어짐을 경험할 것인데, 그때 우리가 들을 주님의 음성이 바로 이와 같을 것이라 기대한다.
44절 앞부분은 '죽었던 이가 밖으로 나왔다' 라고 하는데, '죽다'는 완료형 능동태로 되어 있고, '나오다' 역시 능동태로 되어 있다. 죽는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라자로의 죽음은 자신의 연약함에 끝까지 대항하지 못하고 포기한 것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물론 이것은 자살과는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발들과 손들은 천 조각들로 묶였'다고 하는데, 그는 능동적으로 밖으로 나왔다. 발들과 손들이 묶인 상태로 어떻게 걸어 나왔을까? 아마도 걸어 나온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듯 나왔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걸어 나오라'고 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인데, 그는 발들이 묶여서 걸을 수도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아플 때와는 다르게 능동적이 되었다. 그가 나오자 주님께서는 "그를 풀어 주시오 그리고 그를 가게 허락 하시오"라 말씀하신다.
주님, 요한만이 전한 이 라자로의 부활은 다른 복음서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 보다 신비스럽습니다. 주의 백성들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을 봅니다. 지금 살아 있어서 주님을 믿는 주의 성도들이 각자 받은 동일한 소명에 응답함으로 자아를 죽이고 부활의 생명을 취하게 하소서. 단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통해 영원에 이르는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