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성 vs 하나되는 영성 (요 11:45-57)
죽은지 나흘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적을 보고 많이들 주님 안으로 믿었지만, 그러한 기적을 보고도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보고하러 간 이들도 있다. 이들은 눈으로 기적을 보는 경험을 하고도 그들의 뿌리 깊은 종교성은 주님을 믿는 대신에 종교지도자들에게 일러 바치는 일을 하게 한다. 이제까지도 주님을 대적한 종교지도자들은 이제 여러 사람들이 부활을 목격하는 일이 발생하자 다급히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주님의 표적들을 인정은 하지만 주님 안으로 믿는 대신에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과는 다르다고 주님을 거부하고 정치적 상황 즉 로마인들이 와서 그들의 장소 (즉 성전) 그리고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 걱정한다. (여기 '빼앗다'는 돌을 '굴리다'와 같은 단어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허락할지 말지도 그들의 소관 밖이지만, 그들은 주님을 믿는 대신에 자신들의 밥그릇인 '우리의 장소' 즉 성전과 자신들의 지배 대상인 '민족'을 핑계로 삼는데, 주님의 사역과 죽으심은 결론적으로 그러한 일을 발생시키지 않았고 대신 그렇게도 민족을 위하던 민족주의자들로 인해 주후 70년 이스라엘은 완전 멸망한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모두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고 여기지 않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하지만 요한은 이러한 말이 그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께서 민족을 위하여 곧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 기록한다. 하지만 요한은 주님의 그 죽으심이 멸망을 피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하나 안으로 (그가) 공집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민족'은 혈통적인 유대민족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같은 단어를 쓴 요 1:12에 의하면 '그러나 누구들이건간에 그를 취한 (이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권위를 주셨다 (곧) 그의 그 이름 안으로 믿고 있는 자들' 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하나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엡 2:15).
문제는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종교적인 하나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종교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는데, 여러 종교들은 제도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통합되는 모양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리고 영 안에서 하나됨을 지켜야 하는데,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각자의 의견은 내려놓고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는 의미다.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대로 흩어져 있지 않고 함께 모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함께 기리며 (고전 11:25) 그 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갈 5:16).
주님, 흩어진 주님의 자녀들을 모으소서. 함께 주님을 따르며 순종함으로 세상에 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