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헌신이 교회를 새롭게 함 (요 12:1-11)

1,2,3절은 계속해서 '그래서' 라는 말로 시작한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은 시간적으로는 라자로의 부활 후에 일어나지만 요한은 지난 11장에 미리 마리아에 대해 향유를 부은 자라고 설명한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계속 '그래서'로 이어지고 있다. 라자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사건은 물론 가장 큰 기적 중에 하나지만, 그러한 기적은 그 자체 보다는 주님의 어떠하심과 주님 안으로 믿는 이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어떠한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서 이 향유를 붓는 사건이 놓인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마 26:13과 막 14:9에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복음 만큼 중요한 사건,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사건인 것이다.

2절은 이 세남매에 대해 '마르다는 섬기고 있었'고 '라자로는 그(예수)와 함께 기대어 누워있는 자들 중 하나였었다'라고 기록하는데, 마르다는 항상 열심히 섬기는 자매였고, 라자로는 주님을 위해 마련된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옆으로 기대어 누은, 즉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 취했던 자세를 취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리아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데, '고가의 순전한 나드 향유 한 리트라 (약 340그램)를 취하여 예수의 발에 발랐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털들로 그의 발들을 닦아내었다 (3절)'. 후에 가룟 출신 유다는 이 향유가 300데나리온 즉 거의 한 사람 연봉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귀한 것은 아마도 조금씩 바르는 향수 같은 것이었겠지만 마리아는 전혀 아깝지 않게 전부를, 그것도 머리나 (마 26:7, 막 14:3은 머리에, 즉 다른 상황임) 몸이 아닌 발에 바른다.

발에 바른다는 것은 이 향유의 가치가 주님의 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발에서 곧 흘러내려 방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이어서 '그런데 집은 향유의 향내 밖으로 채워졌다'라고 기록하는데, '그래서' 혹은 '그리고'가 아니라 '그런데'로 되어 있다. 당연히 향유가 흘러 내려서 집 전체가 향기로 가득해진 것은 '그래서'이겠지만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한 여인의 이 아름다운 '허비'가 결국 집 전체를 향기롭게 했다. 주님의 발에서도 향기는 잠시 머물었겠지만 다시 길을 걷다보면 이내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집 안의 향기는 아마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남았을 것이고 나아가 그 동네 전체를 향기롭게 했을 것이다.

'집'이라는 말이 물론 여기에는 문자적으로 일반적인 집을 의미한 것이지만, 성경에는 '하나님의 전' 혹은 '하나님의 집' 혹은 '아버지 집' 등 영적인 집 특히 교회를 의미할 때가 많다. 요한은 이 '집'을 말하며 여기에 또한 '표적'을 남긴다. 주님의 가치를 온전히 보고 주님께 '올인'한 여인의 그 헌신은 주님의 발을 향기롭게 했지만, 결국 집 안 전체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이것은 주님이 계신 그 집 즉 교회를 살릴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이렇게 주님의 가치를 알아보고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 (막 14:4)'하는 이들로 인해 이제까지 지켜져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가룟 출신 유다는 궁극적으로 땅에 뿌려진 그 향유가 아깝다고 여겼다. 생각해 보면 자기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한 일도 아닌데 "무엇을 통해 이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에 건네주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는가? (5절)" 라며 핀잔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향유를 바친 것도 아니고, 또 앞으로 어차피 누구에게든 뿌려질 것인데 주님께 뿌려지는 것은 허비로 여겼던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선한 것이지만, 구제 자체에는 영적인 의미나 유익이 없다. 구제의 목적 역시 복음이며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함인데, 따라서 가룟 유다 같은 이유를 드는 이들은 정말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이들이 아니다. 영이신 주님을 섬기는 것은 영적인 것이며 모든 현실에서 영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도 어처구니 없는 비판을 하는 속보이는 못된 가룟 유다였지만, 그에게 주님께서는 "그녀를 허락하시오"라고 아오리스트 시제로 존중하며 말씀하신다. 이어서 "나의 장사의 날 안으로 (그녀가)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가난한 (자)들은 항상 그대들과 함께 (그대들은) 소유하고 있소 그런데 나를 항상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오 (7, 8절)"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러 번역본들은 '장례할 날을 위해 그것을 간직하게' '아니면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 정도로 되어 있지만, 사실 장례로 쓰려면 향유 (muron)가 아니라 몰약 (smurna, 서머나 교회의 어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날 '안으로 그녀가 그것을 지킬 수 있기' 위함이다. 이 '지키다 tereo'는 율법 등을 '지키다' '보다, 보관하다' 등을 의미하는데, 이제 주님의 발에 발라진 (혹은 부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엎질러진 것이었고 따라서 더이상 지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으로는 엎질러지거나 낭비된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 보화를 소유한 것 처럼 (마 19:21), 진정으로 '지켜진' 것이었다.

9절 역시 또 '그래서 oun'로 시작하는데, '유대인들 밖으로 (부터) 많은 무리가 (그가)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왔다. 예수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 밖으로 (그가) 일으키신 라자로를 또한 보려 했기 때문이었다'라고 한다.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거기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하고 입소문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마리아가 부었던 향유 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교회에 여러 가지 '부흥' 혹은 '전도 폭발' 등의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보다는 단 한명이라도 주님께 헌신했을 때 그 향내는 교회를 채우고 세상 밖에까지 퍼지며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게 하고 (11절), 기적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한 일이 반드시 함께 전해져야 한다. 복음은 값싸거나 공짜가 아니라, 온전히 받게 되면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하게 하는 능력이다.

주님, 주님의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서 펄떡펄떡 뒤기 원합니다. 진정으로 죄인들이 또 교인들이 변해서 증인들이 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리는 한 사람이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