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떠함을 모두 끝내고 주님에 대해 섬기며 따름 (요 12:20-36)
21절은 명절에 예배하러 (문자적으로 절하러) 올라오는 이들 중 헬라인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유대인들과는 달랐지만 유대교를 믿게 된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성전에 가서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을 만나지 않고 (아마도 소문을 듣고) 빌립에게 나아와서 "주여, (우리가) 예수를 보기를 뜻합니다."라고 말하는데, 문화적으로 자신들을 우월하게 여기던 헬라인들이 갈릴리 촌사람인 빌립에게 '주여'라고 부른다.
빌립은 먼저 안드레에게 갔고 후에 둘은 주님께 와서 (그들에 대해) 말한다. 23절은 또 '그런데'로 시작하는데, 그래서 이 헬라인들이 주님을 찾아 온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의 그 아들이 영광되어질 때가 왔다"라는 말씀이 연결된다. 아쉽게도 헬라인들이 주님을 만났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했는지 기록되지는 않았는데, 주님의 초림 때 우선적인 목적은 마 15:24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지만, 이들 헬라인들이 찾아온 것은 주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미치기 시작하는 때로서, 바로 주님의 죽으심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24절 이하의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이 따른다.
주님께서는 특히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시는데, 24절 역시 '아멘 아멘 (내가)그대들에게 말한다. 만일 밀의 낟알이 땅 안으로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것은 홀로 머물고 있다. 그런데 만일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이어서 이 비유를 다음 25절에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 안으로 그것을 보존할 것이다'라고 설명하신다. 이 '밀의 낟알'은 주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앞으로 이 밀알의 죽음을 통해 맺는 또 다른 밀알들 역시 동일하게 죽음으로서 또 다른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암시하신다. 여기 '많은 열매'는 단수로 되어 있는데, '많은' 역시 단수형으로 되어 있지만 복수를 의미한다. 이것은 맺어지는 많은 열매가 모두 동일한 것, 예를 들어 동일한 DNA를 갖는 열매임을 뜻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열매 즉 '아가페'이다 (갈 5:22). 이 아가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시기 때문에 또한 동시에 '영원한 생명'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속사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연장'과 '재생산'에 관한 것이다.
'목숨'으로 번역된 말은 psuche로서 '혼'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이 '혼'은 땅에 속한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과는 다른, 소위 우리의 '자아'다. 24절의 '홀로 머물고 있다'와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가 현재진행형이듯, 25절의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과 '잃고 있다' '미워하다' 모두 현재진행형인데, '영원한 생명 안으로 그것을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만 미래형이다. 따라서 땅에 떨어져 죽고 있는 것이 증명되려면 현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나타나야 하며, 이것은 '자기 목숨을 (혹은 혼을) 미워하'는 것이고, 결국 앞으로 '영원한 생명 안으로' 목숨을 보존할 것을 의미한다. 나의 혼 혹은 목숨을 현재 포기하고 미워해야 앞으로 영원히 보존할 것이라는 말은 매우 역설적인데, 이것은 26절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어진다. 누구든 소위 '자아를 부인'하는 것만으로 끝나면 오히려 불행하지만 이러한 자아 부인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 영원한 생명 안으로 보존한다.
26절은 원어를 직역하면 '만일 누구든 나에게 섬기려는 자는, 나에게 따르고 있으라.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 나의 종도 거기 있을 것이다. 만일 누구든 나에게 섬기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정도가 되는데, '섬기다'와 '따르다' 이 두 동사에 대해 '나'는 목적어가 되어야 하는데, 거의 모든 성경구절에는 '여격' 즉 간접 목적어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를'이 아니라 '나에게' 정도가 되는데, 예를 들어 '나에게 사과를 주시오'라는 문장에서 '나에게'는 여격이지만 '사과를'이 '주다'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된다.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은 '주님' 당신 자체가 그 목적이 될 것 같은데,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냥 섬기고 따르지만은 않는다. 주님을 따를 때에는 그 길을 따라 (고전 12:31, 딤후 4:7, 벧후 2:15), 그리고 섬길 때에는 그 법을 따라 해야 한다 (마 7:23). 이것이 바로 내 방법, 내 생각, 내 감정, 혹은 내 의지 등 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쉬운 것은 아닌데, 평생 아버지와 함께 하심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사셨던 주님도 죽음을 앞둔 이 때에는 "이제 나의 혼이 비통해졌다 그리고 무엇을 말할까? '아버지여, 이 그 때 밖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이것을 통해 이 때 안으로 (나는) 왔습니다 (27장)" 라고 말씀하신다. 이 '비통해지다 tarasso'라는 말은 지난 11:33 '영에 비통하셨다'에도 나오는데, 그때는 '영에' 라고 했지만 이제는 '혼이' 비통해졌'음을 말씀하신다. 성육신을 통해 온전한 인성을 지니신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마도 처음이고 마지막인 것 같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삶이 모든 것이 보장되고 안정된 핑크빛 길을 걷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주 안에서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하지만 그러한 기쁨은 삶이 편안하고 육신이 건강하며 재물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 아니라 이 기쁨 조차 나의 혼 즉 자아의 죽음을 통해 생각과 감정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혼이 비통해지셨음에도 주님은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하늘에서 "(내가) 영광스럽게도 했고, 또한 다시 영광스럽게 할것이다" 라고 응답하신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달라 구했지만, 아버지는 '영광스럽게 하다'의 목적어를 생략하신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있어 주님의 영광을 구할 때, 그의 이름이 영광받으시기를 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 (롬 8:30).
이러한 하늘의 음성에 대해 영적인 귀가 뚫리지 않았던 '무리'에게는 천둥 혹은 천사의 말로 여겨졌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음성이 사실 그들을 위한 것이며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오 (혹은 심판이 있소).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오 (31절)'라 말씀하신다. 이 세상 통치자 즉 마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막았는데,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있고 다시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요 16:11에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세상의 통치자 즉 마귀는 이미 심판을 받았지만 '밖으로 쫓겨'나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리는 미래형 시제로 되어 있다. 이제까지 마귀가 세상의 임금 혹은 통치자였지만, "또 내가 만일 땅 밖으로 들어 올려지면 (나는) 만유를 내 자신 앞으로 이끌 것이오 (32절)"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그 구속의 죽으심을 통해 세상을 이끌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신다.
첫 사람 아담은 죄를 짓고 난 후에 거의 노아의 홍수에 이르기까지 계속 자손들을 낳으며 '아담류'를 생산했지만 결국은 노아를 포함한 그 가족 8명을 제외하고는 홍수에 모두 죽었다. 하지만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땅에서 들려 올려지는 십자가형에 죽으심으로 아담류를 끝내시고 만유를 이끄셔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성육신 하신 것이고 '그 사람의 그 아들'로 불려지신다. 이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죽음을 알지 못했는데, 빛이신 주님이 그들 '안에' 즉 그들 가운데 계셨어도 그들을 몰랐기 때문이다. 빛이신 주님이 곁에 계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 빛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주님은 그들에게 '그 빛 안으로 믿고 있으라'고 명하신다. 단지 그 '빛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빛 '안으로' 믿고 있는 즉 현실에서 그러한 믿음 생활을 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면 '빛의 아들들이 될' 것을 말씀한다 (36절).
주님, 정말 주님 가신 길은 외롭고 무거웠던 십자가의 길이었음을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죽으심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혀졌고 주님과 함께 섬기며 따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살고 있음을 믿게 하소서. 포기할 때 얻고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주 말씀 따라 주와 동행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