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 안에서 발씻기시는 그 관계 안으로 (요 13:1-11)

11절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기록하는데, '자기 사람들'로 번역된 idio라는 말은 1장 11절에도 쓰인 단어로, 영어로는 own 즉 주님의 개인적인 소유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말은 주님을 믿든 믿지 않든 주님께서 지으신 그의 모든 창조물을 포함하는데, 제자들은 물론이지만 주님을 팔아 넘기는 가룟 유다까지도 끝까지 아가페 사랑하셨음을 보여준다.

마귀는 가룟 유다 마음 안으로 주님을 배반할 어떠한 것을 던져 넣었는데, '마음 안으로' 던져 넣은 것을 보면, 마귀는 우리의 생각에 여러 부정적인 것을 던져 넣는 술수를 많이 사용하지만, 유다의 경우 생각을 넘어 마음에까지 들어간 것은 유다가 그러한 생각들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은 항상 변할 수 있지만, 마음은 생각이 굳어진 것으로서 가치관을 좌우한다. 빌 4:6-7은 '아무것도 염려하고 있지 말라 그러나 모든 것 안에 그 기도 그리고 그 간구에 (대해) 감사들과 함께 여러분의 요구들을 하나님께 알아지게 하고 있으라. 그리고 (그러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그 하나님의 그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들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기록하는데, 가룟 유다는 이 하나님의 평강을 잃었고 따라서 그의 마음과 생각이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기는 데까지 공격받았다. 이것은 그가 많은 것들에 대해 하나님과 상관없이 혼자 염려하고, 기도나 간구, 특히 감사함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러분의 요구들을 하나님께 알아지게 하고 있으라'는 부분인데, '알아지다' 혹은 '알게되다'는 3인칭 단수지만 '요구들'은 복수로 되어있다. 그래서 무엇을 알게 하는지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많은 요구들을 한꺼번에 싸잡아서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하나님께 아룀으로 하나님께서 아시도록 하라는 의미같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미 아시지만 바울은 아마도 그의 기도와 간구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아심' 즉 깊은 관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가룟 유다에게는 '일들' 특히 자신의 사업 혹은 사역이 먼저였지 주님과의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주님은 만찬 중에 '만찬 밖으로 일어나지신다 그리고 겉옷을 놓으신다 그리고 수건을 취하셔서 자신을 (허리에) 두르셨다 (4절)'.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다섯번 잔을 들어 마시며 중간에 손도 씻고 음식을 먹는 순서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주의 만찬'은 요한복음에서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이 4절 말씀은 아마도 식사 도중에 벌어진 내용 같은데, 주님은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신다. 이것은 마치 종이나 노예처럼 섬기기 위해서인데, 수건을 취하시고 두르셔서 제자들을 씻기실 준비를 하신다. 손수 대야에 물도 부으시고 '제자들의 발들을 씻기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의) 둘렸던 수건으로 닦아내신다 (5절)'. 유대인들의 관습상 밖에서 들어오면 자신의 손을 씻고, 또 남의 집을 방문하면 종들이 발을 씻어주기도 하는데,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주님, 당신이 나의 발들을 씻으십니까?" 라고 놀라며 묻는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이제는 그대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들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소위 '세족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던 베드로는 "아닙니다. 내 발들을 영원 안으로 씻지 못하십니다." 라고 거부하자 주님께서는 "만일 그대를 씻기지 않으면, (그대는) 나와 부분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부분'이라는 말은 지방, 지역, 혹은 분깃 등을 의미하는 말인데, 시몬 베드로는 '보상'으로 이해해서 "주님, 내 발들만이 아니라, 그러나 손들 그리고 머리도요!"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 역시 '관계'를 의미하는데, 사실 주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만큼 큰 보상은 없다.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듯, 이러한 관계가 바로 영생이고, 따라서 '세족식'은 '관계'를 위한 것이다.

주님의 구속의 죽으심은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지만, 매일 생활 가운데 땅 즉 세상에서 묻어나는 더러움은 씻어져야 한다. 즉 처음 회개는 주님으로 돌아오는 회심이지만, 요일 1:9처럼 신앙생활에는 죄들을 자백함으로 매일의 더러움을 씻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그 씻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후 14절은 단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함을 말씀하시는데, 이 '관계'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서로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단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서 후련해지는 느낌으로 세상에서 위축되지 않고 잘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또한 사람들 간에 친밀한 관계를 그 목적으로 한다. 공관복음서에는 만찬을 강조해서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은 세족식을 더욱 강조하는데, 계속해서 믿음에 대해 '안으로' 라는 전치사를 사용했던 이유와 같다.

주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주님께서 이제 영 안에서 저의 발들도 씻어주고 계심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그 손길을 느낌으로, 저를 다시 용납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것 처럼, 저도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는 관계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주님의 발씻기심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이들의 발을 씻을 수 있음을 압니다. 오늘도 주 앞에 나와 나의 발들이 씻겨짐을 경험하며, 주의 손이 되어 형제들의 발을 씻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