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이나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은 소유의 문제인 아가페 사랑 (요 13:31-38)

31절 유다가 나갔을 때 주님께서는 "이제는 그 사람의 그 아들이 영광되어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영광되어지셨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 두번의 '영광되어지다'는 모두 아오리스트 시제에 수동태이다. 그런데 '이제 nun'이라는 말은 현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아오리스트 시제는 그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완료형과는 달리 현재 혹은 과거 혹은 미래도 의미할 수 있다. 지난 12장 헬라인들이 주님을 찾았을 때 12:23에는 주님께서 '영광되어질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오리스트 가정법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 영광되어지다 (아오리스트)'라고 하신다. 유다가 나감으로 곧 주님은 잡혀가실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인데, '그 사람의 그 아들'은 영광되어짐을 말씀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수치이며 고난이지만 동시에 영광이다. 거기에는 모든 인류에 대한 죄사함의 대속과 부활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주님의 신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32절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영광되어지셨으면, 또한 하나님께서도 자신 안에서 그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주님은 인자이신 동시에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여기에는 '아버지'라 하지 않고 '그 하나님 o theos'이라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로서 주님 안에 공존하시는 신성 즉 하나님은 영광되어지셨고, 그 하나님도 사람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실 것인데,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을 말씀한다.

33절 '자녀들아, 아직 잠깐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는) 나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유대인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라고 말했듯이 이제 너희들에게도 말한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34절은 유언같은 명령을 하신다.

34-35절은 원어를 직역하는 것이 필요한데,

34절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서로 아가페해야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아가페했듯 너희도 서로 아가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랑하라'는 아가페의 사랑을 해야 하는데, 직설법이 아니라 가정법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현재진행형 명령법 능동태 동사가 '~하라'는 명령에 비해 이 가정법은 '해야 할 것이다' 혹은 '할 수 있다면' 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제 주님의 제자들은 곧 주님을 두고 모두 도망할 것이기 때문에 아직은 아가페의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더욱이 '내가 너희를 아가페사랑 했듯' 동일하게 서로 아가페 사랑해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그 해답은 이어 말씀하시는 35절에 나오는데, '이것 안에 너희가 나의 제자들임을 모두가 알것이다 만일 서로들 안에 (너희가) 아가페를 소유하고 있다면' 이라 말씀하신다. 많은 번역본들 특히 한글번역본들은 '너희가 사랑하면'이라고 되어 있어서 먼저 '행위'를 연상하게 하지만, 아가페 사랑을 직접 행하는 행위 이전에 '소유함'이 요구됨을 말씀하신다. 이 '소유하다' 역시 가정법으로 되어 있어서 34절 '(아가페) 사랑하다'와 마찬가지로 명령형이 아니라 일반 동사로 되어 있다. 이 '서로 사랑하는' 문제는 앞으로 요 15:12, 17이나 요일 4:7 등 거의 모두가 명령형이 아니라 이렇게 현재진행형 가정법으로 되어 있고, 특히 '사랑하라'라고 번역된 구절 역시 미래시제 일반 동사로 되어 있지, 명령형으로 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즉 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따라서 이것은 먼저 '소유'의 문제이지 '행함'의 문제는 아니다. 아가페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로 오시는 주님을 먼저 우리 안에 소유해야 이러한 소위 '무조건적' 사랑을 할 수 있다. 인간의 힘이나 의지로 이러한 사랑을 해내려는 것은 오히려 자기 의이며 위선으로 끝나게 된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시몬 베드로는 이 '서로 사랑함' 보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데 그들은 못간다고 말씀하는가에 관심이 더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나를 따를 수 없다 그런데 후에는 따를 것이다." 라고 답하시며 '아가페 사랑'에 대해 현재는 베드로가 행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심과 동시에 후에는 할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자신의 능력이나 처리해야 할 자아의 문제를 아직 모르는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혼이라도 내려 놓을 것이라 말하자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네 혼을 놓을 것이냐? 아멘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나를 (네가) 세번 부인할 때까지 수탉이 결코 소리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신다. 대부분 한글번역은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번 부인할 것이다' 정도로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이렇게 훨씬 더 강하게 되어 있는데, '닭 울기 전'은 새벽을 의미하지만, 혹시라도 새벽이 올 때까지 베드로가 부인하지 않아도 닭은 울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베드로가 세번씩이나 부인을 해야지 비로서 수탉이 울것을 말씀하는데, 이것이 소위 우리 자아의 끈질김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아가 드러나고 이에 대해 뼈아픈 경험을 해야만 진정 우리가 주님의 아가페를 소유해야 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주님, 우리 각자 안에 또 우리 가운데 주님의 아가페 사랑을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보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랑을 행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온전하고 충분히 소유하며 누릴 때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흐를 줄 믿습니다. 주님의 생명, 그 아가페를 오늘도 우리 안으로 공급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