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적으로 온전히 경험하는 아가페 사랑 (요 14:15-24)
15절은 사본에 따라 "만일 너희가 나를 아가페한다면, 내 계명들을 지킬 것이다" 혹은 끝 부분이 '지키시오'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이 '아가페하는' 문제는 다시 말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주님을 아가페할 수 있게 된다면 자연히 주님의 계명들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가 지킬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지키시오'라는 내용의 사본도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 아가페를 행할 수 있는 힘과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힘은 동일한 것이다. 그 힘은 아가페를 우리 안에 소유함에서 나온다.
우리가 주님의 그 아가페를 소유하면 자연히 그 아가페는 힘을 발해 우리로 아가페를 행할 수 있게 (혹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할 것이고 따라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셔서, 아버지께서는 '다른 권위자를 (그가)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세대 안으로 너희와 함께 계시도록. / (권위자 - 권하고 위로함)' 라고 말씀한다. 보통 '보혜사' 즉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라고 번역된 이 말은 중국어 성경에서 온 것인데, 그 보다는 '권위자'가 더 낳을 듯 하다. 원어 '파라끌레토스'는 parakaleo가 어원이며 그 의미는 '옆에서 부르다' 즉 '권하고 위로하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나바의 별명이 '권위자'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아들'인데, 이 역시 parakaleo가 어원인 paraklesis이다.
주님은 이 다른 '권위자'에 대해 '그 진리의 그 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17절), 이를 '세상은 받을 수 없으니 그를 보지도 않고 알지도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한다. 세상이 그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보지도 않고 알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즉 세상은 이러한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눈과 지식이 없으므로 받을 능력이 없다. 하지만 제자들은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다. 아직 성령께서 부어지기 전이지만 주님께서는 "너희들은 그를 알고 있다. 그가 너희 옆에 함께 거하고, 너희들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한다. 신앙 생활은 이 권면하시고 위로하시는 영을 떠나서 완전히 불가능한데, 그 분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롬 8:9, 벧전 1:11), 그리스도와 하나이시고 그래서 이미 제자들은 그를 알고 있으며, 이미 현재 '옆에 함께 (para) 거하시고' 앞으로 '너희들 안에 계실' 분이 된다. 성령께서는 '크로노스' 시간에 의하면 전혀 새로운 영이시겠지만, '카이로스'로는 과거 구약과 동일하신 분이셔서 이제 믿는 이들 '안에' 계속해서 거하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18절에 '(나는) 너희를 고아들로 (놓아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에게 오고 있다'라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시는데, 3절에도 '나는 다시 오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직 떠나시지도 않았는데 현재 진행형으로 다시 오고 계심을 말씀한다. 계시록 22:20도 '나는 속히 오고 있다' 그리고 '아멘 오고 계시옵소서'라고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다. 주님은 앞으로 오실 주님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다시 오고 계시는 분이시다.
19절은 '다만 조금을, 그리고 세상은 나를 더 이상 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도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는데, 주님께서는 현재 살아 계시지만, 제자들은 현재 죽은 것이 아닐지라도 앞으로 '살 것'을 말씀한다. 즉 이 생명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짧은 목숨을 의미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데, 주님께서는 '나를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 처럼 항상 살아계시는 분이시다 (히 7:25).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그 아들'로서의 죽으심이고, 부활 역시 인자로서의 부활이다. 그래서 사람인 우리도 그의 본을 받아 부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인데, 주님께서는 영적인 죽음은 겪지 않으셨지만, 십자가 상에서 한번은 아버지께 완전히 버림받으셔야 했다. 이것은 성육신 사건 만큼이나 신비로운 사건인데, 아마 이때 가장 경악했던 것은 사탄 아니었을까? 주님의 죽으심으로 사탄은 더 이상 그 누구도 비방할 수 없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20절에 '그 날 안에 너희들은 내가 내 아버지 안에 그리고 너희가 내 안에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 역시 아버지 안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소유하신 분으로, 주님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께 오고 또 아버지와 하나될 것인데, '그 날 안에' 그렇게 됨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21절은 다시 '내 계명들을 소유하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 그는 나를 아가페하는 자이다 그런데 나를 아가페하는 자는 내 아버지에게 아가페 될 것이다. 또 나도 그를 아가페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내 자신을 나타낼 것이다'라고 말씀한다. 주님과 아버지와는 끊을 수 없고, 그러한 관계 속에 우리도 또한 포함될 것이다.
많은 죄인들은 주님을 혹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푸념하며 비방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을 아가페 사랑하는 자를 아가페하실 것이며 그러한 이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을 말씀한다. 주님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신다. (물론 바울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이는 주님의 주권이다) 이에 대해 다시 가룟 아닌 유다가 주님께 묻고 다시 주님께서는 동일한 답을 하시는데, "누구든 나를 아가페하면 나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께서 그를 아가페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을 곳을 만드실 것이다" 라고 23절은 기록한다. 여기에 다시 주님을 아가페 사랑하는 자는 (자연히) 주님의 말씀(단수)을 지키게 될 것을 말씀하는데, 결국 아버지께서 그를 아가페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세상을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은 독생하신 아들을 주신 사랑이고, 그 독생하신 아들을 사랑해서 말씀을 지키는 자는 개별적인 아가페를 통해 '그에게 오실 것'을 말씀한다. 오실 것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곳을 만드실 것'인데, 여기 '있을 곳'은 지난 2절과 같지만 단수로 되어 있어서 '개별적' 즉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함께 거하실 곳을 만드실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셀 수 없이 무수한 아들들을 소유하실 것이지만, 그들 하나 하나와 함께 거하시는 관계를 만들어 가신다.
이에 비해 "나를 아가페하지 않는 자는 내 말들을 지키지 않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듣고 있는 말씀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다 (24절)"이라 말씀한다. 당연한 말씀이다.
주님, 주님을 아가페 사랑하는 자에게 이러한 기적이 있음을 믿습니다. 나의 사랑으로는 불가능함을 고백 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주님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아가페를 구합니다. 주님을 더욱 나타내셔서 온전히 증언하는 증거자들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