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전에 택하심을 받아 주의 영과 함께 증언하는 우리들 (요 15:18-27)
목회는 고사하고 믿음 자체를 지키는 것에도 사실은 고난이 따른다. 만일 목회를 하며 '성공'을 기대하고 모두가 우러러 보는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을 목적으로 둔다면 매우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막 10:30 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이 기록 되었지만, 이 말씀은 믿는 자들 각자가 개인적으로 재산을 축적하여 부자가 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공동체에 속함으로 공동적인 재산에 참여한다는 뜻이 더 크다. 이것이 사회주의적인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사회주의는 믿음이나 영을 따르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들의 힘과 능력으로 좋은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인복주의적인 착각에서 기인한다. 세상은 믿는 이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데, 믿음의 가치관과 그 방식은 세상의 것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 국가들은 자본주의를 따르지만 그것은 비교적 성악설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각자 개인적인 욕망을 따라 열심히 일하며 그에 따라 부를 축적한다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경제나 마케팅의 기본은 소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요일 2:16)'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이에 비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반대로 성선설을 기본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원죄를 말하는 성경과는 배치되며 따라서 틀린 것이지만, 흥미롭게도 성선설을 기본으로 여김에도 각자 개인은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따라서 국가나 사회가 개인에 대해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세운다.
아무튼 만일 세상이 우리 믿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대로 두거나 우리를 오히려 기뻐한다면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임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세상은 주님을 미워했고 따라서 주님의 종들인 우리 역시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이유는 세상 가치관이나 그 시스템을 따르지 않고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하나님을 떠난 그것들은 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에 속한 사람들은 사랑 (phileo)하지만 반면에 하늘에 속한 이들은 미워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세상 밖으로 믿는 이들을 택하셨듯이 세상 사람들 중에는 주님을 따르고 주님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또한 앞선 믿음의 사람들 즉 주님의 제자들의 말을 지킨다 (20절).
22절은 '만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를 소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이) 그 죄에 대해 변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는데, 주님은 정죄도 심판도 하지 않으시지만,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요 12:48)'는 말씀 처럼 주님의 말씀이 그들이 죄를 소유하고 있음을 드러내는데, 먼저 이 말씀은 과거 구약의 '그 법' 즉 율법이며, 또 다음 16장 8-9절에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라고 하며,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는 그 정죄함이 끝났지만, 이를 믿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바로 죄임을 말씀한다. 갚을 수 없는 나의 모든 빚이 주님의 구속의 은혜로 청산되었음에도 그 빚을 끌어 안고 죄인의 삶을 계속해서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죄임을 증거하신다.
그래서 24절은 "만일 (내가) 그들 안에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일들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를 소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미워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하지 않았다면'의 시제는 아오리스트이기 때문에 과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일들' 즉 주님의 모든 사역과 더불어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을 포함하는데,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보았고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또한 보고도 믿지 않고 미워했기 때문에 그대로 그들은 죄(단수)를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공로가 그들에게는 죄가 되어 버린 것이다.
26-27절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권위자가 오시는 때에, 아버지로부터 떠나시는 그 진리의 영 그가 나에 대해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그런데 나와 함께 태고로 부터 있으므로, 증언할 것이다." 라고 기록하는데, 성령께서는 권면하고 위로하시는 분으로서 그 바탕은 진리에 있다. 그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 바로 진리를 말씀하심으로 권면하시고 위로하신다. 진리가 어떨 때는 우리에게 힘들고 버거우며 부담이 된다해도 그것은 참된 것이다. 그래서 승리할 것이고, 이미 승리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참됨을 성령께서 증언하시듯 증언한다. 흥미로운 것은 '태고 arche'라는 단어는 1장 1절부터 나온 의미심장한 말인데, 창조의 시작 혹은 그 이전의 시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때 있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사역) 초기부터' 혹은 '시작부터'가 아니라 아예 '태고부터' 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은 그의 '택하심'이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기 때문이고, 바울은 이에 대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증언한다 (엡 1:4).
주님, 세상 부귀와 권력은 매우 매혹적인 것임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온 존재를 가지고 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또 주님의 택하심으로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이기 원합니다. 태초부터 또 창세 훨씬 이전에 우리를 택하심을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로만은 부족함을 압니다. 이 진리가 우리 안에 깊이 자리잡고 뿌리내리며 우리의 삶을 이끌며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