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의 파급 (요 16:25-33)

33절 '비유'라는 말은 마 13:34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킹흠정)'의 parabole가 아니라 paroimia라는 단어로 '밀어' 즉 비밀스러운 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 이것들을 밀어 안에 (나는) 너희에게 말했다 (그러나) 더 이상 밀어 안에 너희에게 말하지 않을,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 너희에게 공개적으로 전할 때가 오고 있다' 정도가 된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이유는 막 4:12의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즉 그 비유를 알기 원하는 이들은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와서 구해야 했었지만, 이 '밀어'는 그러한 자들 보다는 제자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그들이 받기 어려운, 특히 아버지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주님께서 죽으실 때가 가까이 와서 '공개적으로 전할 때가 오고 있'다.

다시 26절은 '그날 안에 (너희는) 내 이름 안에서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리고 내가 너희들에 대해 아버지께 여쭐거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라고 하시는데, 하나님 아버지께 주님을 따른 제자들에 대해 여쭐 필요가 없는 것은 이제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말씀하시고 또한 27절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친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했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음을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삘레오인데, 보통 아가페를 더 깊고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해하지만, '친밀감'에 있어서는 이 phileo가 더 강하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로 여기셨듯이 아버지도 그들을 친구의 사랑인 phileo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28절은 '(나는) 아버지 밖으로(부터) 나왔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왔다'보다는 '나왔다'가 더 맞는 번역이다. 이어 '그리고 세상 안으로 왔다 다시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짧은 구절은 주님의 비밀을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성육신하신 분으로서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데, 오셨을 때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지만 다시 돌아가실 때는 육신이 승천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계기로 육신인 사람이 변화되어 신성에 이를 수 있게 하셨다. 창 6:3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여호와의 영 즉 성령께서는 사람이 육신으로 타락할 때 즉 사람이 영에 속하지 않고 썩어 없어질 육신으로만 남아 육신의 것만 구하면 결코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없다. 하지만 이 육신된 사람이 영으로 거듭나면 하나님께로 오는 길이 열린다. 그래서 육신이 되신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부활하셨지만, 그 부활을 통해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비록 지금은 육신 안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 죽고 부활함을 통해 혹은 휴거의 홀연한 변화를 통해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이다.

제자들은 '보소서 이제 (당신께서) 공개 안에 말하십니다 그리고 밀어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께서 모든 것을 아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당신에 (대해) 물을 것에 (당신은) 필요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안에서 (당신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음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29-30절).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31절에 '이제 (너희가) 믿고 있는가?'라고 답하시는데, 여기 '답하다'는 '물었다'와는 다른 단어지만, '묻다'의 의미에도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헬라어는 문장 자체 만으로는 일반문인지 의문문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은데, 그래서 '이제 너희는 믿고 있다'라고도 해석이 된다. 제자들이 주님께 이렇게 신앙고백을 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제야 너희가 믿는 것이냐?'라고 물으셨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너희가 이제 믿는 구나'라는 의미도 된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정말 믿었을까? 아닌게 아니라 조금 후면 그들은 주님을 홀로 두고 떠난다고 말씀하신다 (32절). 그래도 이렇게 '너희는 믿느냐' 혹은 '너희는 믿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함 아니었을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33절에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했다 내 안에서 평안을 (너희가) 소유하게 하려고. 세상 안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평안은 조금만의 충격이나 요동에도 깨진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는 누구든 고난이 있다. 하지만 주님 주시는 평안은 이미 승리하신 주님 안에서의 평안이다. 그래서 담대할 수 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그 승리는 정치적이나 강압적인 승리가 아니라 그 죽으심을 통해 세상과 우리 사이의 악연과 세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끊으신 온전한 승리다. 세상은 우리에 대해 죽었고, 우리 또한 세상에 대해 죽었다 (갈 6:14).

주님, 하나님과 결코 함께 할 수 없던 육신에 속한 혼들이 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통해 이제 주와 합함으로 한 영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승리 안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여러 불안한 소식이 창궐하는 이 때에 주님의 평안을 붙잡습니다. 주님을 붙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