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필요함 (요 17:1-5)
어떤 설교자는 17장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아버지'이며 따라서 이 단어가 이 17장의 핵심이라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 말에서 '아버지'로 번역된 말은 원어나 영어에는 2인칭 단수 즉 '당신'으로 되어 있다. 물론 보통은 많이 나오지 않는 이 단어가 여기에는 26번이나 나오기 때문에 핵심 단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이 17장이 기도문이기 때문이고, '아버지'라는 단어는 6번만 호격으로 나온다. 보통 많이 나오는 단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 17장은 꽤 신비롭다.
1절은 '이것들을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의 눈들을 하늘로 드셨다 말씀하셨다. "아버지, 그 때가 왔습니다. 그 아들이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소서'라고 하시는데,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어떨 때는 '나'라고 하시지만 많은 때 '그 아들' '그 사람의 그 아들' 등 3인칭으로 말씀하신다. 특히 '나는 ~이다 ego eimi'라고 말씀하실 때는 주님의 신성을 특히 나타내시고, 3인칭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육신으로 오신 당신 자신에 대해 신성하신 분의 입장으로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여기도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라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의 그 아들을'이라고 말씀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로 부터, 혹은 '아버지 밖으로' 혹은 '아버지로 부터 함께' 오신 분으로서 아버지와 구분은 되지만 뗄 수 없는 분이시다.
2절은 '(당신께서) 그에게 모든 육체의 권세를 주신 것 처럼 (이는) (당신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이들)에게 그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보통 '사람'에 대해서는 '혼 psuche'라는 말을 쓰지만 여기에는 '육체 (혹은 육신) sarks'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는 '하늘 안 그리고 땅 위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다 (마 28:18)' 라고 말씀하셨는데, '육체'는 땅에 관계된 것이지 '하늘 안' 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하늘'은 문제가 없어서 소위 '주기도문'에도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라고 말씀하시듯, 부활과 승천을 통해 주님께서는 하늘 안과 땅 위 모든 권세를 받으셨지만, 여기 죽으시기 전에는 '모든 육체의 (혹은 육체에 대한) 권세를' 받으신 것을 말씀한다. 그 이유는 모든 육체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우리가 누릴 영원한 생명이 혼적이거나 영적인 상태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도 변화되어 영원한 몸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3절은 '그런데 이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곧 (그들이) 오직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 그리고 (당신께서) 파송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 입니다'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영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아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으시고 위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 '이것'은 여성격 대명사로 '알다 ginomai'의 명사격인 gnosis가 여성격이며, 따라서 이 '앎'을 수식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앎' 자체가 영생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 그리고 (당신께서) 파송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 입니다 (가정법)'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선 '새번역' '우리말 성경' 등 몇몇 한글 번역본은 '한 분'이라는 원어에 없는 말을 추가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된 분이시지만, '한 분'은 아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두 분을 말씀하고, 이 두 분은 하나이시다 (22절). '아는 것' 혹은 '앎'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알고 있다'라는 현재진행형 동사를 쓰신 이유는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즉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알다'는 소위 체험적인 깊고 친밀한 지식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알아가기 위해서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광활한 우주를 이해하는 것만도 억겁의 시간이 필요할텐데, 그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떠하랴!
4절은 '나는 내가 해야 하는 (당신께서) 주신 그 일을 완성함으로 땅 위에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 '완성하다'는 19:30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 말씀하셨을 때 '이루었다 (완료)'와 어원이 같은 단어다. 여기 4절의 시제는 아오리스트로 앞으로의 십자가의 구속을 가리킨다. 십자가 상에서는 값을 모두 지불하심으로 그 일을 완료하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구속의 죽음을 우리도 감히 하려고 (그럴 자격도 없지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의 공로를 믿는 것이다 (요 6:29).
개역개정은 5절을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번역했는데, 원어에는 '창세'라는 말은 없고 단지 '세상 전에' 혹은 '세상 앞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있다 (혹은 이다) einai' 라는 동사에 인칭이 불확실해서 '세상'을 수식하는지 아니면 아버지 혹은 주님을 수식하는지 불분명하다. 특히 시제는 현재진행형이라 '세상'이 창조된 즉 과거나 완료와는 다르다. 따라서 이 동사는 아마도 아버지와 주님을 수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리고 이제 당신께서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 아버지여, 당신 자신과 함께, 세상 전에 내가 소유했었던 당신과 함께 있는 그 영광에!" 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 영광은 지금 함께 있고, 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그 영광이며,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 전에 소유했었던 것이다.
주님, 참된 영생, 참된 영광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주님을 알아 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압니다. 주님을 우리에게 더욱 드러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