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지키시며 거룩한 하나로 만드셨기에 우리도 계속해서 성화되어야 함 (요 17:6-19)

주님께서는 6절에 "(나는) (당신께서) 세상 밖으로 (부터) 나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과거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혹은 '야웨' 즉 '나는~이다'였고,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나는~이다 ego eimi'로 여러번 말씀하셨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지만, 여기에 더 풍성하게 다른 것들이 따라오는데, 따라서 주님께서도 '나는 세상의 빛, 생명의 빵, 포도나무, 부활, 생명, 그 길' 등등 많은 것을 말씀하셨고, 그것들은 모두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이어서 "(그들은)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또 그들을 (당신은)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것이었습니다'는 미완료로 과거 계속 그랬었음을, '주셨다'는 아오리스트, 그리고 '지켰다'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단수의 '말씀'을 지켰는데,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제 (그들은) 당신께서 내게 무엇이든 주신 모든 것들이 당신으로부터 함께 임을 알았습니다 (7절)' 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비해 8절의 '말씀들'은 복수에 '레마'로 되어 있는데, 기록된 ㄹ로고스의 말씀이신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레마의 말씀들이 나올 때 그들은 받았다. 이 또한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오셨음을 진정 알게 되고, 또 아버지께서 주님을 파송하셨음을 믿게 되었다.

9절은 '나는 그들에 대해 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내게 주신 이들에 대해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것 입니다'라고 기록하는데, 택하신 이들에 대해 구하고 계심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아가페 하셔서 독생하신 아들을 보내셨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이들만 구원 받는다. 이들은 특별한 이들이기 때문에 10절은 '나의 것들' 그리고 '당신의 것들'이라는 말로 주님과 아버지께 속했음을 말씀하시며, 특히 그러한 사람들 안에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음을 보여주신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안에 계시지 않고 아버지께로 가실 것인데, 제자들은 계속 세상에 존재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구하시는데, 이 지키심을 통해 아버지와 주님께서 하나이시듯 '그들도 하나이게 하소서' 라고 구하신다. 여기는 '되게 하소서'가 아니라 '이게 하소서' 라고 구하시는데, 히브리어에는 이 두 단어에 구별이 없지만 헬라어에는 확실히 구분된다. 제자들 혹은 주님 안으로 믿는 이들은 이미 하나임을 말씀하시는데, 이 '하나'는 어떤 제도나 사상이나 교리를 통한 것이 아니라 마치 주님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시듯 그러한 완전한 하나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고전 6:17).

11절과 13절 아버지께 '간다'는 단어는 erchomai로 '가다' 혹은 '오다' 둘 모두를 의미한다. '가다 (혹은 떠나다)'만을 의미하는 단어는 여기에 apo를 붙인 aperchomai가 있기 때문에 이 erchomai는 되도록이면 '오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오셨지만, 한번도 아버지를 떠나신 적이 없기에 para라는 단어를 쓰고 따라서 아버지께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신'다. 동일한 단어가 지난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에 쓰였다. 보통 '아버지께 갈 자'라고 해야 맞는 것 같은데, 주님께로 올 때 바로 아버지께로 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오다'이다. 그래서 13절은 '그런데 이제 (나는) 당신께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 안에서 이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채워진 내 기쁨을 그들 안에 (그들이) 소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요한복음에 승천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 안에 충만한 기쁨을 간직하게 하시는 주님을 계시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해 구하시는 것은 그들을 지켜주시는 것인데, 특별히 '악으로부터' 지키심이다. 하지만 단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인 목적은 거룩함에 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진리 (혹은 참) 안에서' 가능한데, 아버지의 말씀 즉 기록된 말씀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주님께서 진리이심을 말씀한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즉 성경으로부터 영생을 얻는데, 지난 5:39에는 주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이고 이는 곧 주님이시다.

그래서 진리인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데, 이렇게 거룩하게 된 이들을 주님께서는 세상 안으로 파송하신다. 흥미로운 것은 거룩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계 15:4), 사람은 속되어서 결코 거룩할 수 없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면 사람도 거룩하게 되는데, 19절은 '그들도 참 안에서 거룩해졌기' 즉 완료형으로 말씀하시며 이미 우리가 진리 안에서 거룩해졌음을 알려 주신다. 그런데 이를 위해 주님은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있'다 말씀하신다. 이미 거룩하신 주님께서, 또 이미 거룩해진 (완료형) 주님의 소유된 이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다시 거룩하게 혹은 성화하고 계신다. 온전히 인성을 소유하신 분으로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는데,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우리들 역시 한번 거룩하심을 입었다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성화시켜야 함을 보여준다. 진리 안에 계속 거하며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주님,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나이시듯 우리가 하나임을, 또 주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으니 우리도 계속 그 거룩함을 지키며 성화되어야 함을 봅니다. 아버지께 구하신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시고 그 구하심은 응답받으셨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