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왕, 참 유월절 어린양께서 '아빠의 아들'을 대신하여 죽으심 (요 18:28-40)

일단 유대인들의 대제사장 혹은 지도자들의 심문 후에 그들은 주님을 당신 주둔하던 로마 군정 혹은 프레토리움으로 데려갔는데, 그 때가 새벽이었다고 28절은 기록한다. 밤에 주님을 잡아서 밤새도록 심문하고 새벽부터 로마 군정에 세우는데, 주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열심은 잠까지 잊게 한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죄없는 분을 죽이려고 열심을 냈던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자신들이) 더럽혀지지 않고 유월(절) (어린양)을 먹을 수 있도록 프레토리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로마 군정은 속된 곳이었기 때문에 유월절에 참여하려면 그러한 장소를 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빌라도가 그들에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 사람에 대해 무슨 기소를 가져오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 좀 어처구니 없는 그림인데, 아마도 당시 유대인들의 풍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이렇게 대응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악을 행했다고 말했고, 이에 대해 빌라도는 그들이 주님을 취하고 그들의 법에 따라 재판할 것을 권하지만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누구를 죽이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이러한 대답은 매우 이기적인 것인데, '누구를 죽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지 않고 '허가하지 않다' 즉 능동태로 말한다. 율법에는 악한 자에 대해 죽이라 명하는 사항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율법에 따라 죽일 수 있는 명분은 있었다. 당시 주둔군이던 로마인들 외에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의인이신 주님을 죽이는 것에 대해 분명 거리낌이 있던 것 처럼 들린다.

빌라도는 이러한 말을 듣고 다시 프레토리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불러들였는데, 정작 주님은 당당하게 이방인의 장소로 들어가셨다. 빌라도는 주님께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오" 라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묻다' 혹은 '문의하다' 혹은 '구하다'라는 말 대신에 '말하다'라는 동사가 쓰였다. 헬라어는 러시아어 처럼 의문문이나 기본문이나 어순이 같아서 글로 쓰면 정확하지 않은데, 그래서 빌라도는 주님께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오? 라고 묻는 물음은 동시에 '당신은 유대인들의 왕이오!' 라고 고백하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이 이것을 (당신) 스스로 말하고 있소 아니면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하여 당신에게 말했소?" 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님의 물음에 빌라도는 "도대체 내가 유대인인가? 당신의 민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엇을 했소?"라며 주님께서 왕이심을 부인한다. 주님께서는 이 '유대인들의 왕'에 대해 "내 왕국은 이 세상 밖으로가 아니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밖으로 였었더라면 내 수하들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겨주게 되지 않도록 다투었을 것이오. 그런데 이제 내 왕국은 여기로부터가 아니오." 라고 답하신다 (36절).

그래서 37절은 빌라도가 다시 주님께 "그러면 당신은 왕이시오?" 라고 말한다. 점령군에게는 반란 문제가 가장 민감한 것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주님께서 로마제국을 대항하여 유대인들의 왕으로 나서는 문제가 빌라도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당신은 (내가) 왕이라고 말하고 있소. 내가 이 안으로 태어나졌고 이 안에서 세상 안으로 왔소 곧 참을 증언하기 위함이오. 참 밖으로의 모든 (이들은) 내 소리를 듣고 있소" 라고 대답하신다. 왕국 혹은 권력을 탐하거나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 '참' 혹은 '진리'라는 말은 허구에 가깝다.  이 '참'이라는 말은 '현실'이라는 말과 같은데, 적어도 빌라도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는 '힘'이나 '재물' 혹은 여러 종류의 모사나 전략 등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이 아닌 '참' 혹은 '진리'를 말씀하신다. 그래서 빌라도는 주님께 "참이 무엇이오?"라고 묻는데, 그가 정말 진리에 대해 알고 싶어서 물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진리란게 뭐 대수냐?'는 식으로 말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는 기로되지 않고, 다만 빌라도는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전에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나가서 그들에게 "나는 그 안에서 아무런 연고를 찾고 있지 않노라"고 말한다. 이 '연고'는 고소할 거리를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 '있지 않다' 역시 능동태로 되어 있다. 빌라도는 주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모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물어보지도 않은 '유월절에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를 언급하는데, 혹시라도 주님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였겠지만 (39절) 유대인들은 대신에 바라바를 원한다. 그런데 40절은 '그런데 바라바는 강도 였었다' 라고 기록한다. 이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완료'가 아닌 즉 과거진행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바라바는 강도로 살고 있었지만 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을 암시한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들도 존재하지만, 바라바는 풀려나며 그 원인을 궁금해 했을 것이고 결국은 주님 때문에 자신이 풀려났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강도였었다는 것은 강도로 살았다는 즉 한 두번 강도짓이 아니라 종종 강도짓을 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이가 감금되었다가 주님 때문에 풀려난다. 마 27:16은 이 바라바가 '유명한 죄수'라고 기록하는데, 강도이며 유명하다는 것은 아마도 연쇄살인마 처럼 많은 못된 짓들을 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막 15:7과 눅 23:19 역시 '민란' '살인'등을 언급한다.

이 '바라바'라는 이름은 바르 아바 즉 '아바의 아들' 즉 '아빠의 아들'이라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아마도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가 너무도 흐뭇하고 기쁘고 사랑스럽고 감사가 충만해서 '너는 내 아들이야!' 라며 '바라바!' 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우리 역시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창세기 1장 31절은 기록한다. 하지만 그런 아담, 그리고 바라바가 타락하고 강도로 변한다.. 타락한 아담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은 어린 양을 죽여서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이제는 육신으로 오신 주님께서 다시 바라바 그 아빠의 아들 즉 인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다.

주님, 이 못난 저희들, 괴물로 변한 저를 위해, 아니 죄인 괴물로 태어난 저를 위해 대신 죽으심을 다시 봅니다. 은혜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은혜를 오늘 묵상하며 그 은혜로 다시 승리하기 원합니다. 참으로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