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 시간으로 보는 당시 상황 (요 19:1-16)
마 27:26과 막 15:15는 빌라도가 주님이 채찍질 당하게 한 것이 십자가형 전에 응당 하던 일처럼 기록 되었지만, 요한은 시간적으로 이 채찍질과 십자가형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기록한다. 1절은 '그래서 그 때 빌라도는 예수를 취했다 그리고 채찍질 했다'라고 하고, 4절과 6절 10, 15절 등을 보면 빌라도는 계속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지 않도록 힘 썼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한 형벌로 여겼기 때문인데, 원어로는 '십자가에 못박다'에 '못 박다'이라는 말이 없고 '십자가형을 하다'로 되어 있다. 물론 못을 박기는 했지만 원어에는 '못'이라는 말은 없다. 문법적으로 '채찍질하다'는 3인칭 단수로 되어 있지만 아마도 빌라도가 직접 채찍질 했던 것 보다는 그에 의해 수하들이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아마도 주님께 십자가형이 아닌, 채찍질로 끝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태와 마가는 이때 병정들이 주님께 침도 뱉고 주먹으로 쳤다고 기록하지만, 요한은 그보다는 약하게 묘사하는데, 2절은 그 병사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서 주님 머리에 '얹어 놓았다'라고, 그리고 '보라색 예복을 그에게 둘렸다'라고, 또 3절은 주님 앞에 와서 "기뻐하라 유대인들의 왕이여!" 라고 말하며 손바닥질을 했다고 기록한다. 즉 이것은 정말 상해의 목적보다는 무시하며 조롱하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상해 보다 조롱이 더 고통 스러울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빌라도가 밖에 나와서 유대인들에게 주님에게서는 '아무런 연고도 찾고 있지 않음을' 그들에게 알렸다.
5절은 원어로 주님께서 '가시 면류관과 보라색 예복을 지시고 밖으로 나오셨다'고 하는데, 보라색 예복은 원래 고귀한 사람들이 입던 옷색깔이지만, 제대로 입은 것이 아니라 2절처럼 '둘렸다' 혹은 5절에 마치 짐을 지듯이 '지셨'음을 기록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보시오, 그 사람(이오)"라고 말하는데, 정관사 '그'가 있어서 the man 즉 생명의 삶 해설처럼 '참 인간'을 암시하는 듯한 뉘앙스이다.
그런데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보자마자 대제사장들과 수하들은 "십자가형에 (처하시오)! 십자가형에 (처하시오)!"라고 외친다. 아마도 대제사장들은 그 수하들에게 그렇게 외치라 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도 빌라도는 "당신들이 그를 취하시오 그리고 십자가형을 하시오. 나는 그 안에서 아무 연고도 찾고 있지 않기 때문이오" 라고 답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그 법' 즉 율법에 따라 주님을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이오"라 말한다. 8절은 '그래서 빌라도가 이 말을 들었을 때 더욱 두려워졌다' 라고 기록하는데, 주님의 어떠하심을 맞대어 보며 이미 두려움을 느꼈지만,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더더욱 두려워졌다. 그래서 주님께 "당신은 어디로부터 이시오?" 라고 물었지만 주님은 더 이상 그에게 대답을 주지 않으셨다. 계속해서 빌라도는 주님께 "나에게 말하지 않고 있소?" 즉 자기에게 말을 하면 놓아줄 수도 있다고 하면서 "(나는) 당신을 놓아줄 권위도 소유하고 있고, 당신을 십자가형을 할 권위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소?" 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위로부터 당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나에게도 아무런 권한을 소유하지 않았을 것이오. 이것을 통해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자는 더 큰 죄를 소유하고 있소." 라고 답하시는데, 여기 '위로부터'라는 단어는 지난 3장 '거듭나다'의 '거듭'과 동일한 단어로 '다시' 혹은 '위에서'를 의미한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단지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위에서' 즉 하늘로부터 태어남을 말하는데, 이 말은 마 8:9와 눅 7:8의 백부장 케이스 처럼, 군대를 관할하는 빌라도에게는 매우 민감하고 의미심장한 말로, 자신 위에 시저가 있는 것은 물론 어떤 신적 존재가 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주님을 놓아주기 원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만일 이 (자)를 놓아주면, (당신은) 시저의 친구가 아닙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모든 자는 시저에 척언하고 있습니다"라고 빌라도를 부추겼다. 결국 이들의 목소리가 그를 이겼고 재판이 시작되는데, 주님을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모자이크 석판)이라고 불리는 곳 즉 모자이크 돌판으로 만든 곳에 위치한 높은 의자에 앉았다.
14절이 흥미로운데, '그런데 (당시는) 유월(절)의 준비(날)이었었다 때는 육시 쯤이었었다'라고 기록한다. 지난 18장 29절부터 빌라도의 관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했는데,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대제사장들은 그 전날 밤 수하들을 동원해서 주님을 체포한 후 밤새도록 대제사장 관저에서 심문을 하다가 '새벽'에 빌라도에게 찾아갔고, 그 때 부터 19장 13절까지 이 모든 일 한시간 정도면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즉 이 '육시'는 새벽 여섯 시를 말하는데, 유대인들의 안식일 그리고 유월절 등은 아침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이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빨리 잡아서 금요일 오후 늦게까지는 십자가형을 끝내기 원했다.
마 27:45, 막 15:33, 눅 23:44 등 공관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여섯 시부터 아홉 시까지 어둠이 내렸다고 기록하고, 막 15:25는 주님께서 세 시에 못 박히셨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시간은 유대시각으로, 지금 시간으로는 아침 6시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을 넘겨줬고, 그들은 십자가를 준비해서 주님께 지우고 골고다까지 가서 아침 9시에 주님을 못박고,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둠이 내렸던 것이다. 이 모든 퍼즐을 맞추다 보면 요한이 기록한 시간은 공관복음과는 다르게 로마시간임을 알려준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보시오, 당신들의 그 왕(이오)" 라고 말했다고 요한은 기록하는데, 막 15:9, 12절에서 빌라도가 주님에 대해 '유대인의 왕' 혹은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주님에 대해 '유대인의 왕' 혹은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이해했겠지만, 요한은 이에 대해 오히려 빌라도가 주님께서 '너희의 그 왕'이라고 선포했다고 증거한다. 마치 민수기 22장의 나귀가 말을 하며 증거했던 것 처럼 종종 이렇게 이방인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도 한다.
다시 동원된 유대인들이 "그(를) 없애시오! 없애시오! 그를 십자가형 하시오!" 라고 외치자 빌라도 "당신들의 그 왕을 (내가) 십자가형을 해야 하겠소?" 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대제사장들은 "시저가 아니면 (우리는) 왕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답한다. 대제사장들은 이 '왕' 앞에 정관사 없이 말했지만, 빌라도는 계속 정관사를 붙여서 당신들의 '그 왕'이라고 말한다. 주님의 백성은 주님을 배척하고 영접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압제하던 로마 황제 시저를 그들의 왕으로 추앙하는 것에 비해 오히려 이방인 빌라도는 주님에 대해 '그 왕'이라 칭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막무가내 요구로 인해 빌라도는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도록 넘겨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넘겨 받았는데, 의인이신 주님, 온전하고 거룩하신 분이 이리 저리 넘겨줌을 당한다. 구약의 요셉이 몇 번 넘겨짐을 당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주님, 당시 상황에 대해 네 명의 기자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 입체적이며 참된 것임을 봅니다. 시간을 시작하시고 그 안에서 구속사를 이뤄가시는 주님은 참으로 그 왕이시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