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능력, 그것으로 바뀌어진 것들 (요 20:23)
성경의 '날'은 창세기부터 그 앞의 '밤'과 '오늘'의 낮 시간을 합한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주일 새벽까지 무덤에 계신 것은 70시간에서 많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3일만'에 혹은 '제 삼일 째'에 부활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3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말씀했는데, 제자들은 모두 이해도 하지 못하고 믿지도 않았다. 그런데 유독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 3일째 되던 아침 일찍 어둠에 간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틀째도 아니고 이렇게 3일째 되던 날에 주님이 계셨던 무덤에 간다. 가서 보니 돌이 굴러져 있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해주니 그 둘이 달려서 무덤에 도착했는데, 요한이 더 빨리 뛰었지만 베드로가 후에 도착해서 먼저 무덤 굴 안으로 들어가서 아마포가 개여 있는 것을 본다. 주님의 머리를 둘렀던 수건은 따로 개여 있었는데, 그렇게 확인을 한 후에야 요한도 들어가서 보고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 9절은 '아직 (그들은) 그가 죽은자들 밖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성경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하고 10절은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라고 기록한다. 이 두 제자들은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고도 그냥 다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는데, 무덤을 향해 울며 밖에 서 있다가 무덤 안으로 굽어 보았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보이지 않던 두 천사가 보인다. 여기 '보다'라는 말은 '눈여겨 보다'의 의미인데, 제자들은 주님의 아마포와 수건만을 볼 수 있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눈여겨' 보니 이 천사 둘이 보였던 것이다. 하나는 예수의 몸이 뉘였던 곳 머리에 그리고 또 하나는 발 쪽에 앉아 있었는데, "부인이여, 왜 울고 있습니까?" 라고 묻자 마리아는 "(그들이) 나의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어디에 뉘였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한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당신들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겠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이 더 컸기 때문에 오직 주님에 대해서만 답한다.
그리고 나서 (잠간) 뒤돌아 보니 누가 서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았지만 주님인지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님께서 "부인이여, 왜 울고 있소? 누구를 찾고 있소?" 라고 물으셨고 이에 그녀는 주님께서 동산지기인 줄 생각하고 "주여,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뉘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그리고 나는 그를 가져 갈 것입니다" 라고 답한다. 그녀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던 것일까! 주님을 사랑한 만큼 주님을 만난다.
주님께서 "마리아야!"라 부르시자 돌아보며 그녀는 히브리 말로 "라부니!" 라고 외친다. '선생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혹은 당시 아람말인데, 아마도 이제까지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불렀던 말이었을 것이다. 동산지기인줄로 생각하고 불렀던 말은 일반적인 '주여' 즉 영어로 하면 sir 그리고 스패니쉬로는 senor인데, 그 보다 '라부니'라는 말은 조금 더 가까운 관계인 동시에 존경의 거리가 있는 호칭이다. 악한 이들이 주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에 대해 연인사이로 조롱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호칭은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어떻게 여기고 따랐는지 말해준다.
17절에 흥미롭게도 주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 아직 아버지께로 (내가) 올라갔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런데 내 형제들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시오. (나는) 올라 가고 있다 나의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 그리고 나의 하나님과 너희의 하나님께로."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 '만지다 aptomai (합토마이)'를 개역개정이나 공동번역에는 '붙잡다'라고 번역을 했지만 문자적으로는 그냥 '만지다'인데, '잡다'라는 말은 krateo라는 단어가 있어서 23절에 '그대로 있으리라'에 쓰였는데, 원래는 '잡다'로 막 14: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등에 쓰였다.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잡고 놓아주지 말것을 명하신 것이 아니라 '만지지' 말것을 명하셨는데, 그 이유는 '아직 아버지께로 (내가) 올라갔지 않았기 때문'이라 설명하신다.
주님께서는 보통 '아버지께로 온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여기에는 '올라갔지' 즉 다른 단어이며 시제도 완료인데, 부활 후 이렇게 주님을 사랑함으로 무덤에 왔던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시기 위해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을 조금 미루신 듯 하다. 그 후 같은 날 저녁에는 도마에게 만지는 것을 넘어 못자국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까지 명하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보신 후에 아버지께로 이미 올라가셨던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공식적인 승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지만, 아마도 이미 그 이전에 아버지께 '올라갔다' 오셨을 것이다.
다시 돌아갔던 두 제자들은 주님을 만나 뵙지 못했지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나는) 주님을 보았다" 라고, 그리고 자기에게 그러한 것들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전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직도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모든 문들을 닫아 놓고 있었는데, 그 같은 날 저녁에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안으로 오셔서 서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화가 그대들에게!" 즉 '샬롬'이라 문안하신다. 마치 아무일도 없던 것 처럼 일상의 문안이었지만, 이때 만큼은 그 말씀하시는 평안이 능력임을 제자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의 손들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이셨는데, 아마도 그 이유가 염을 해서 얼굴이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주님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것 아닐까? 아무튼 제자들은 주님을 보며 기뻐했는데, 주님은 다시 '샬롬'이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 나를 파송하셨던 것 같이 나 또한 그대들을 보내고 있소'라고 얘기해 주신다. 왜 여기 '파송하다'와 '보내다'를 다르게 말씀하셨을까? '파송'은 비교적 더 공식적인 의미로 들리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일반적인 '보내다'라는 말도 이제 능력이 된다. 주께 보내심을 받은 자는 (공식적인) 파송을 받은 자이고, 이것은 마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을 파송하신 것과 같다!
이 '보내심'을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는데, 곧바로 "성령을 받으시오"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의 '위로 임하심'은 오순절에 이루어졌지만, 이미 이때 제자들은 주님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성령을 받는다. 주님이 아직 가시지 않으셨기에 시간적으로는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 부활 후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령을 받은 후 받게 되는 권세에 대해 '만일 누구의 죄들을 놓아 주면, (그 죄들으) 그들에게 놓아졌소. 만일 누구의 (죄들인지) 잡고 있으면 잡혀졌을 것이오'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의 '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 '죄들'로서 '죄'는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해결됐지만, 아직도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죄들'에 대해 주님의 제자들은 놓아 줄 수도 또한 잡고 있을 수도 있음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는 다 사함 받았지만, 주님께서는 '놓음'만이 아니라 '잡음'도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 이것은 다시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와 연관이 있다. 제자들에게는 주님에 대해 전할 수 있는 권위가 있는데,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들이 듣고 회개하여 주님을 믿으면 그들의 죄들까지 사함을 받고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지만, 전하지 않으면 즉 그들의 죄들을 잡고 있는 것이 되면 잡혀지게 된다.
흥미롭게도 여기 시제는 미래가 아니라 완료가 되는데, '진리를 아는 것'이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 처럼, 주님의 복음은 우리로 죄들에 대해 온전히 '놓아졌음'을 혹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대해서는 '잡혀졌음'을 증언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부활을 통해 그 후 성령을 받는 이들이 누릴 권세인 동시에 책임이다.
주님, 부활 후에 세상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지만, 너무도 많은 것들이 발생했음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부활의 의미를 더 깊이 알고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죄들을 고하며 용서하며 주님을 더욱 깊이 뜨겁게 사랑하도록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