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고 믿는 것이 행복이며, 믿는 것이 생명을 소유하는 것임 (요 20:24-31)
3절에는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가 나온다. 시기적으로는 거의 모든 다른 성경들이 기록된 후이기 때문에 요한은 이 복음서를 따로 쓸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한에게 있어 이미 유다를 시작으로 마가 마태 누가 베드로 바울 등등 여러 사도들이 주님에 대해 기록했지만, 그가 '그런데 이것들이 기록되어 진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그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고 있음으로 그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여러분이) 소유하게 하려 함이다'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믿음의 기본을 다시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다른 사도들과는 다르게 ek라는 말과 eis라는 말을 꽤나 자주 쓴다. 예를 들어 '제자들 중 한 사람' 이라는 표현을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하나' 정도로 기록하지만 요한은 '제자들 밖으로 (ek) 하나'로 말한다. 또 '주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거의 모든 경우 '주님 안으로 (eis) 믿는다' 라고 표현한다. 더우기 '무덤에 가다'라는 표현도 누가가 '무덤에 (epi)'라는 전치사를 쓴 것과는 다르게 '무덤 안으로 (eis)'라고 기록한다. 요한에게 있어 이 ek와 eis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디두모' 즉 '쌍둥이'를 의미하는 별명으로 불렸던 도마는 아마도 주님과 얼굴이 닮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라고 말한 것에 대해 "만일 (내가) 그의 손들 안의 못들 자국을 보고, 못들 자국 안으로 내 손가락을 넣고, 그의 옆구리 안으로 내 손을 넣지 않는다면 결코 믿지 않을까 하오" 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8일 후에 다시 주님께서 오셨을 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는데, 주님께서 다시 '샬롬' 하시며 문안하신 후에 먼저 도마에게 "그대의 손가락을 여기로 가져와서 나의 손들을 보시오 그리고 그대의 손을 가져와서 내 옆구리 안으로 넣으시오. 그리고 불신이 되지말고 신앙이 되어라" 고 말씀하신다.
부활하신 후에는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제 8일 후에는 도마보고 만지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8일 간 주님께서는 아버지를 만나고 오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마에게 주님의 손들을 보고 손을 가져와서 옆구리에 넣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의 목적은 '안믿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져라'에 있다. 그제서야 도마가 "나의 주여,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고백했는데, '주'와 '하나님' 모두 앞에 정관사 호격이 있어서 주님을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마는 아마도 이제까지 주님을 주님으로는 불렀지만 신격에 대해서는 의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 주님을 비로소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러한 도마의 말에 주님께서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그대는) 믿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행복한 (이들)이다." 라고 답하신다.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도마는 보고 믿었지만 앞으로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행복한 (이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보다'의 시제는 아오리스트 동사구로 되어 있고, 이것은 아오리스트 시제가 과거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을 다시 보여준다) 주님께서 '행복하다 (혹은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신 적은 마태복음 5장의 소위 '팔복'과 누가복음 6장의 '4복4화' 그리고 계시록의 '칠복' 등이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13:17의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와 오직 여기에만 기록되었다. 요한에게 있어, 그의 복음서를 통해 '행복'은 주님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영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어도, 믿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주님, 오래 사는 것 혹은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바로 주님 안으로 믿고 있는 것이 생명임을 알게 하소서. 주님을 믿어도 육신은 적어도 한번은 죽지만, 그것은 자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의 신비를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