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기록되는 그리스도의 은혜 (요 21:15-25)

15절과 16절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사랑'은 '아가파오' 즉 아가페 사랑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에 대해 모두 phileo로 답한다.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에도 이러한 단어적 차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요한은 이렇게 '사랑'이라는 단어에 분명한 차별을 둔다. 어찌보면 phileo라는 단어가 더욱 친근한 느낌을 주고, 따라서 주님을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그러한 단어를 쓰는 것 조차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먼저 이 phileo를 쓰시지 않고 아가파오를 쓰심으로 베드로가 phileo라도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배려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한 것에 대해 회복하게 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처음 대답에 대해 주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고 답하신다. 즉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그렇구나, 다행이다' 라는 말씀보다 명령을 하시는데, 그의 소명을 새롭게 하시는 명령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에 대해 자책하며 좌절함으로 주님의 소명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것에 대해 심판 보다는 그 원래 소명을 회복하신다.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 양들을 목양하라"는 명령을 하시는데, 앞의 명령이 '어린 양들'에 대해 그들을 '먹이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두번째는 '양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즉 먼저 먹임으로 어느 정도 성장한 양들에 대해서는 '목양'이 필요한데, 이 '목양하다'라는 단어는 양을 친다는 말이다. '치다'라는 우리 말이 마치 '때리다'라는 단어처럼 들리지만, 양을 먹이고 인도하기 위해 지팡이로 툭툭 건드리는 것에 더 가깝다.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시편 23편 처럼 지팡이와 막대기를 갖고 계시는데, 지팡이는 양을 치기 위한 것이고 막대기는 늑대나 위험한 짐승을 대항하는데 쓰는 것이다. 목자들 혹은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양처럼 대하며 목양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치는' 즉 좋은 땅이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 가운데 거듭나지 않은 염소들도 존재할 것이다.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앞서 '두번째'라는 말은 부사로 되어 있지만, 마지막 베드로에게 물으셨을 때 '세 번째' 라는 말은 목적격으로 되어 있어서, 직역하면 '(그가) 그에게 세 번째는' 정도가 된다. 즉 이 '세 번째'는 조금 더 특별한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제 더 이상 아가페가 아니라 베드로의 대답처럼 phileo로 물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에게 세 번째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하셨기에 불안해졌다' 라고 이어진다. 베드로는 "주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지난 세 번에 걸친 그의 배반에 대해 이러한 고백들을 통해 지금 회복되고 있다. 베드로는 "당신께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라고 말하는데, 보통 '알다'는 완료형을 쓰지만 여기에는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다. 베드로가 매우 큰 실수를 했지만 지금 그는 솔직하게 주님의 용납하심을 받아 들이며 주님을 phileo하고 있음에 대해 주님께서는 알고 계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다시 주님께서는 그에게 "내 양들을 먹여라"고 말씀하시는데, 목회자의 사명은 어린 양들이든 나이든 양들이든 주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다른 양들을 먹일 수 있도록 성장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렇게 성장할 때까지 계속해서 먹여야 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주님께서는 새롭게 주신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데, 그 후에는 더 이상 이렇게 부르시지 않고 행 10:13, 11;7 등을 보면 다시 '베드로야'라고 부르신다. 주님을 믿는다고 해도 주님을 배반했던 이는 베드로가 아니라 과거 천연적으로 태어났던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다. 하지만 이때를 계기로 이제 더 이상 그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온전히 새롭게 태어난 한 새 사람으로서 새 이름만 있다.

18절은 직역하면 "아멘 아멘 (내가)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를) 둘러매었었다 그리고 뜻했던 곳에 걸었었다 그러나 늙을 때는 그대의 손들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띠를) 둘러맬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뜻하지 않는 곳으로 (그대를) 가져 올 것이다." 그리고 19절은 '그런데 이것을 (그가) 말씀하신 (것은)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지 표식 삼으심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르시며 그에게 "나를 따르고 있으라!" 라고 말씀하신다' 정도가 되는데,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는 이미 베드로가 죽은 뒤였을 것이다. 사도행전 후에 베드로에 대한 기록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설만이 남아서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요한은 그의 죽음을 목도하며 혹은 들으며 주님께서 그에 대해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고, 당시 사람들 역시 이러한 증언을 바탕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다. 베드로의 말년이 어떻게 되는 것 보다는 지금 주님을 따르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고 베드로의 소명이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아마도 옆에 있던) 요한이 궁금해져서 "주님, 그런데 이 자는 어떠한지요?"라고 여쭙는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만일 그를 내가 오기까지 머물게 하기를 (내가) 뜻한다면 그대에게 무엇인가? 그대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또 이 말씀에 대해 '형제들 안으로 나갔다 바로 그 제자가 죽고 있지 않다고,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가 죽고 있지 않다고 이르시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를 내가 오기까지 머물게 하기를 (내가) 뜻한다면 그대에게 무엇인가?" (라고 말씀하셨다)' 라고 언급한다. 요한은 왜 이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다른 제자들에 비해 오래 살았던 그가 마치 죽지 않고 계속 살 거라고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일부러 이렇게 기록한 것일 수 있다. 주님께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던 말씀은 주님을 믿으면 육신적으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무튼 제일 오래 살았던 제자로서 요한은 '이것들에 대해 증언하고 이것들을 기록'했으며 또한 '그의 증언이 참된 것임을 알았다'고 말한다.  25절은 많이들 '과장법'으로 해석하지만 원어를 직역하면 '그런데 예수께서 하신 다른 (것들)은 또한 많아서 만일 (그것들이) 각 하나(씩) 기록된다면, 세상 자체도 그 기록되어지는 책들을 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정도가 된다. 여기 예수께서 '하신'이라는 단어는 '행하다' '만들다'를 의미하는 poieo인데, 시제가 아오리스트로 되어 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신 3년 반 동안의 모든 역사도 결코 적지 않지만, 창조주로서 그리스도의 행하심은 무한하다. 또 '기록되다'의 시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주님의 어떠하심은 아직도 기록되고 있다. 그래서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라는 찬송을 한다.

주님, 요한복음을 끝내면서 주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풍성히 넘치기 원합니다. 상황이 매우 악하지만 이 가운데 주님께서는 계속 목양하시며 다스리십니다. 실수했던 주의 종들을 다시 일으키시고 소명을 새롭게 하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고난의 때 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주님의 생명과 능력과 아가페가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세상에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