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도피성, 가까이 계신 그리스도 (신 4:41-49)
소위 도피성에 관한 기록이다. 이곳으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부지중에 이웃을 미워함이 없이 죽인 사람인데, 따라서 고의적인 살인으로 살인한 자는 이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도피성에 도망해도 우선은 잠간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잘못이 밝혀지는대로 그는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한다. 이 도피성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19장에 기록되는데, 백성들 간에 벌어지는 중범에 대해 19:21은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고 엄중하게 기록하며, 따라서 부지중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인한 자는 본인의 목숨도 부지할 길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신명기를 기록한 첫 부분에, 그것도 다른 율법 조항을 말하기에 앞서 이 도피성에 관해 짧게라도 기록했다는 것인데, 이는 과거 여러 문화에 생명을 존중하는 보편적인 가치가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실수에 대해 이렇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점이다. 도피성을 유지하려면 거기에도 사람이 살아야 하고 그 특성상 추가로 요구되는 여러 사항들과 이를 존속하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 등이 필요했을 것이다. 언제 누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쓸지, 그리고 이 도피성까지 무사히 도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이러한 특별한 장소를 각 지파마다 마련한 것은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른 종교나 신들이 인간을 천대하고 부리는 존재로 여겼던 것과는 다르게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서 가치를 두셨음을 볼 수 있다.
요즘 미국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추이가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앞으로 2주간이 매우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이 판데믹 전염병에서 도피할 수 있는 어떤 곳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Safer at home'이라는 말 밖에는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삶을 살 수는 없기에 장도 봐야하고 온라인으로는 할 수 없는 필수적인 일들도 처리하려면 밖에 나가야 할테지만 그 어느 곳도 이제는 안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결국 우리 자신이 깨달을 것은 '처음부터 살인한 (요 8:44)'인 마귀가 타락한 인류의 아버지이며, 우리는 원래 그에 속했지만, 참된 도피성이신 주님께로 도피했을 때, 우리의 의지로 죄인으로 난 것이 아닌 것 처럼 (물론 그렇다고 주님의 은혜를 떠나 처벌을 피할 수는 없음은 분명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려 주신다.
주님, 오늘 우리의 도피성이신 주님 안에 거하기 원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는 주님의 의를 이룰 수 없고, 형제를 미워함으로 이미 살인한 자들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저희들을 용납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의롭게 하시고 주를 닮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