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주야를 채우신 여자의 후손 (눅 24:1-12)

눅 23장 마지막에 주님께서 안식일 전 날에 죽으셨음을 기록하고 바로 24장에 이어서 '안식 후 첫날'이라고 개역개정은 번역했기 때문에 마치 주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죽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하지만 원어에는 23장 54, 56절의 '안식(일)'은 단수로 되어있고 24장 1절은 복수로 되어 있어서 '한 주간'을 의미한다 (물론 이 단어가 안식일로도 번역된다).  특히 원어에는 '그런데 de'라는 단어가 있어서 이제 시간적으로 다른 때 임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래서 원어를 바탕으로 1절을 번역하면 '새번역' 처럼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이 맞고 여기 앞에 '그런데'가 붙어서 '그런데 그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으로 되어야 한다.  만일 23장 마지막 부분의 안식일이 원래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었다면 1절은 '이튿날 (에파우리온, 마 27:62)'이나 '그 다음 날 (헥세스 헤메라 눅 9:37)'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마리아를 부각시키지만 누가는 1절부터 '이 여자들 (원어에는 그들)' 이라고 하며 계속해서  복수형 동사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 모두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3절), 모두 천사들로 추정되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이 그 여자들에게 처음 한 말은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느냐 (5절)' 였는데, 원어에는 '살아 있는'은 동사로, '죽은 자들'은 소유격 형용사 복수로 되어 있어서, 주님께서는 바로 유일하게 '그 살아계신 (자)'이시고, 죽은 자들은 생명을 잃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한글 번역본들은 이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위엄있게 반말로 얘기하는 것으로 번역했지만 6절 원어의 '기억하라'는 아오리스트 시제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서 존대말 느낌이다.  즉 6절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여러분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어서 7절은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라고 하는데, 여기 이 '인자'는 주님께서 항상 당신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시던 말로서, 원어로는 '그 사람의 그 아들' 즉 앞에 정관사가 하나씩 붙어 있다.  헬라어로 '사람'은 그냥 사람을 의미하지만, 이것을 히브리어로 생각해 보면 '아담'이 되는데, 그래서 '그 아담의 그 아들'이다.  즉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 (원어로는 그녀의 씨)'은 바로 '그 아담의 그 아들'이 되며, 주님의 죽으심으로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지만 또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거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아담은 후에 셀 수 없는 자녀들과 후손들을 낳았지만, '여자의 씨'는 바로 '그 아담의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구약에도 '인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에스겔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자, 벤아담 (겔 2:1)'으로 계속 부르셨고 다니엘도 그렇게 부르셨다 (단 8:17).  흥미롭게도 7:13의 인자는 히브리어로 '바르 에나쉬'로 되어 있어서 '남자의 아들'의 의미다 (히브리어 남자 'ish' 여자 'ishshah').  단 10:16에도 '베네 아담'이라고 같은 단어가 쓰였지만 여기는 '아들들 (베네)'이 복수로 되어 있다.  구약의 그 누구도 정관사 '하'가 붙은 '그 사람의 그 아들'로 불린 적이 없는데, 히브리어의 정관사는 헬라어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오직 주님만 이렇게 기록된다.

주님, 주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그리고 독생하신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세번째 날에 다시 일어나셨고 항상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여자의 씨로서 그 아담의 바로 그 아들이십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옛 사람 아담의 후손의 모습을 버리고 한 새 사람으로, 그리고 주와 합하여 한 영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사람을 그 타락한 상태의 인류에서 이제 주님께 속한 신류로 이끄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도 일어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