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복, 생명을 누림 (신 5:22-33)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비롯 여러 명령 규례 법도 들을 주신 이유는 인생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괴롭히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지킴으로 주님을 경외하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복 즉 생명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24절은 모세 뿐만이 아니라 '우리' 즉 지파의 수령들과 장로들도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 즉 단수의 사람인 모세만이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화하고도 살았는데, 수령들과 장로들은 더 이상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두려워했다. 26절도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았다고 말하며 육신으로서 그렇게 살아남은 것을 경이롭게 여겼고, 따라서 그 후부터는 모세에게 부탁해서 간접적으로 말씀을 듣기 원한다고 말한다.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육성으로 듣는 것은 경악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을 했음에도 그들은 살아 남았는데,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하며 더 이상 그 음성 듣기를 마다하고 대신 모세에게 말씀하시면 모세를 통해 듣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요구가 옳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 '옳다'라고 번역된 말은 '맞다, 의롭다'의 의미가 아니라 '즐겁다, 좋다, 잘한다'를 의미하는 '야타브'이다. 물론 구약 경륜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직접 말씀하신 경우는 이 이스라엘 외에는 없고 다만 히브리서 1장 1절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기록 하는데 여기 '통해'는 dia가 아니라 en 즉 '안에'이다. 그래서 '선지자들 안에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지만 이제 주님께서 오시고 난 후에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기록한다. 여기도 원어에는 '아들을 통하여'가 아니라 '아들 안에서' 인데, 그 의미는 우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 아들 안에서 마치 과거 구약의 선지자들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말씀은 생명이고 (요 6:68, 행 5:20, 빌 2:16, 요일 1:1),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또한 살고 살아나며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 33절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때, 그의 백성은 '살 것'인데, 여기는 흥미롭게도 앞서 모든 명령형으로 이해했던 Qal 미완료 동사로 되어있다. 즉 '살 것이다'이지만 앞 내용처럼 번역하면 '살아라'가 된다. 즉 이것은 앞서 모든 명령이 언약이며 또한 이렇게 '살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 역시 명령일 수 있다는 의미다. 더우기 이 '살다, 카야'라는 동사는 '살다, 소생하다, 생명을 얻다' 등 영어의 live와 life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는 생명이 되며, 이것이 바로 영원한 복을 얻고 누리는 것이다.
주님, 주의 명령은 짐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축복과 사랑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 곧 영생을 주시기 원하시고, 그것은 주의 말씀을 통해서임을 봅니다. 주의 말씀을 먹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누립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