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정신 (신 14:22-29)

원래 십일조 의무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신 그리스도로 인해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중세 유럽의 타락한 카톨릭에서 교회세 처럼 징수하다가 근대에 와서 미국 기독교에서 십일조가 다시 실행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 교회 역시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성경에 기록된 십일조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말 십일조의 '조'는 '세금, 쌀' 등을 의미하는데, 과거 이스라엘 상황에서는 한 국가 그것도 신정 국가를 운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성격이 있었지만, 이제 신약 시대에서도 마치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처럼 교인들의 의무로 볼 수는 없다.  오늘 말씀을 잘 보면 원래 '나눔'의 의미가 우선인데, 현재 기독교의 십일조 정신 역시 기본적으로는 나눔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 쓰여지는 내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22절은 '매년 토지 소산'이라 기록하는데, 십일조는 '토지 소산'이 기본이다.  이와 더불어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릴 때 마다 가축의 처음 난 것으로 드렸는데, 레위기 27:32에는 가축의 십분의 일 역시 드렸다.  제사 후에는 제사장 몫도 있고 레위인들을 위한 것도 있지만 본래는 26절 말씀 처럼 '너와 네 권속' 즉 십일조를 내는 사람과 그 가족 그리고 각 성읍에 배정된 레위인들과 함께 즐기는 것 즉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하는 축제와 잔치가 그 목적이다.  여기에는 죄사함의 기쁨과 복주심에 대한 감사와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포함되는데, 신 26:11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고 기록된다.

28절은 '매 삼년 끝'이라고 하는데 매년 소산의 십분의 일을 모아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 오지만, 삼년 마다 한 해의 끝 즉 니산월 정월 전 지금으로는 3월 정도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내어 저장한 후 레위인을 시작으로 객들과 고아들과 과부들에게 베푸라 명하신다.  따라서 이렇게 삼 년 째에는 그 해의 소산에 대한 십분의 일을 그들과 나누라 명하신다.  신 26:12에는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기록해서 이 셋째 해에 드리는 십일조가 '매년' 드리는 십일조를 대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년마다 하나님께 드리지만, 삼년 째에는 서로들간에 나누는 것인데, 물론 이것도 여호와 앞에서 하는 것이다.

이제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는데, 더이상 물질적인 성전이나 거기에 종사하는 이들도 없고 따라서 그에 필요한 자원 역시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십일조가 제대로 시행될 때는 이것으로 레위 지파를 부양하는 것은 물론 구제 그리고 성전 운영 보수 수리까지 모두 해결이 가능했다.  십일조를 내고 싶었지만 낼 수 없었던 때도 있었는데, 성전이 파괴되었을 경우이다.  그래서 바벨론에게 함락당한 후 성전이 파괴되고 난 뒤에는 십일조가 끊어진다.  에스라가 성전을 재건하고 그 후 느헤미야가 성벽을 세운 후에야 비로소 십일조도 재개되었다 (느 12:44, 13:12).  이제 더 이상 물질적 성전이 없는 현재에는 유대인들 조차 십일조를 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현재에도 십일조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면 목회자들도 10 가정의 십일조로 생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물질적으로 너무 큰 부담을 주지 않으신다.  수입이 많으면 십일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십일조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전제 아래).  이제 물질적 성전에서 모이지 않고 영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에서는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따르면 된다.

주님, 과거 거룩한 십일조가 현재 교회의 타락과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이 시대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교인들이 물질을 탐하고 추구하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헌금이나 십일조를 내기 전에 먼저 주님을 사랑하며 기뻐하는 것이 우선되도록 우리의 목적을 새롭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