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기르가스와 히위 (신 20:10-20)
소위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지난 신 7: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라고 나오고 그 후에도 수 3:10, 24:11 등에도 기록되었는데, 이들에 대해 이미 창세기 10장과 15장에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출애굽 후에 차지할 지역임을 예언하셨다. 그런데 느 9:8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 즉 히위 족속이 빠지고, 또 오늘 17절은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라고 기록하며 '기르가스' 족속이 빠졌다. 원래 기르가스 족속도 살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자 그들은 떠났기 때문에 그들은 제외되었다고 하며, 느헤미야에서 히위 족속이 빠진 것은 그들의 일부인 기브온이 꾀를 내어 진멸당할 것을 면하고 이스라엘을 위해 물 깃고 장작 패는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히위 족속은 창 34장에 의하면 야곱의 딸 디나가 당한 일에 그 아들들이 그들을 속여 복수했다고 기록하는데, 서로 속이고 속이다가 결국 여호와께 묻지 않고 그들을 외모만 보고 살려 두는 일이 발생했다. 따라서 17절의 명령에 대해 히위 족속, 더 자세히 기브온은 진멸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는 먼저 화평을 선언하고 받아들이면 조공을 바치며 섬기게 하라 하셨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인 남자들은 다 죽일 것을 말씀하는데, 이러한 명령은 잔인하게 들릴지 몰라도 고대에는 오히려 더욱 잔인한 일들이 민족들 간에 자행되었는데, 바로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해서는 진멸하라 명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즉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것에 이스라엘 백성이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 (18절). '그 신들에게'와 '모든 가증한 일들'이라는 언급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악한 것을 좇아 인간성 자체를 말살시키는 어떤 것으로 보인다. 이 일곱 족속에 대해 많은 설명과 영적 해설이 있는데, 결국 이민족들이 행하던 악한 일들이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어도 오늘의 시각으로도 경악할 만한 일들이 자행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소위 '보편적 가치' 즉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 등 성경적 개념에 상반하는 지독한 악행들이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 (단수)는 끝났고, 따라서 주님을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정죄받지 않는다. 하지만 '죄들 (복수)'의 문제는 남아 있는데,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 혹은 죄의 기질들이다. 일곱 족속 중에 다섯은 진멸했고 기르가스는 떠났으며, 히위는 아직도 살고 있는 것을 보며, 이러한 일곱 족속이 현재 우리 안에 어떠한 죄성으로 남아 있는지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제거하기 힘든 죄는 아마도 기르가스 즉 우리와 이미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교묘히 우리를 속이는 히위 족속의 어떠함일 것이다. 기르가스는 떠났지만 느 9:8 에 다시 언급되는 것을 보며 아마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는 어떠한 것으로 보인다. 기르가스라는 말은 진흙탕을 의미하는데, 순수한 물에 조금이라도 진흙이 섞이면 더러워지 듯, 순수하지 않은, 그리고 어떠한 혼돈을 말한다. '혼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죄사함 받은 이들로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약 1:27)' 않도록 거룩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말씀 대신에 세속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용납하다 보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뜨겁거나 차지 않게 되어 결국 주님으로부터 토해 내쳐지게 될 것이라 말씀한다 (계3:16).
히위는 '작은 마을, 시골' 등을 의미하는데, 이들 중 기브온이 이스라엘을 섬겼던 것 처럼 우리의 노예라고 생각되어 지는,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혹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라 여기는 것들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매우 큰 영향을 알게 모르게 끼치는 것들인데, 주님 주시는 평안과 기쁨 보다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좇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특히 치명적인데, 말씀에서 길을 찾거나 교훈 혹은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뉴스 등으로 우리의 가치관이 물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매우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히위의 일부인 기브온은 후에 느디님이 되어 성전에서 봉사하는 이들로 변함 받아 끝까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는 충성된 이들로 변화한다. 이들은 진멸당해야 할 이들임에도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데, 오락과 예능 혹은 예술 등 문화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이들이 이러한 경우일 수 있다. 세상에서는 크게 인기도 없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도, 혹은 세상의 인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묵묵히 이러한 부문에서 섬기는 이들이 있고, 우리에게는 이러한 이들도 필요하다.
주님, 주님의 은혜는 히위를 느디님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히위에 대해 신중하며 그들도 진정한 주님의 종으로 삼을 수 있는 행동하는 믿음을 우리 가운데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