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아들, 순종하신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심 (신 21:15-23)
오늘 말씀은 세 가지 즉 장자권, 패역한 아들에 대한 처사, 그리고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 이에 관한 명령이다. 15절의 일부다처제를 허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명령들은 현대에 적용할 수 없고 다만 당시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것인데, 따라서 문자적 명령 보다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어떠함과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개역개정을 비롯, 한글 번역본에는 '아들, 장자, 맏아들, 첫째' 등으로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원어에는 그냥 '장자 히 bekor, 헬 prototokos'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장자권 prototokia'은 개역개정 히 12:16 '장자의 명분'으로 번역되어 단 한번 나온다. 장자는 그에 따른 권리를 갖는데, 바로 유산에 대해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배를 받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장자권이다. 고대에는 이것이 권리이며 축복이라 여겼고, 이에 대해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야곱과 에서의 경우다. 히 12:16는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흠정역)'고 기록하는데, 공동번역번은 앞서 15절과 16절을 연결하여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 ㉠칠십인역 신명 29:17-18. 또 음란한 자나 음식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먹은 에사오 같은 불경스러운 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라고 번역했다. 이 두 구절의 명령어는 '조심하라'이며 그 사항들은 따르는 내용들인데, 바로 16절에 에서의 예가 나오며 그는 '음식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었고 이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앞서 '음란한 자나'와 '불경스럽다'가 원어에는 연결되어 있어서 에서가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것은 단지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또한 음란한 것이었음을 밝힌다. 음란의 심각함은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 그 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인데, 에서는 현재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야곱에게 장자권을 판다고 선언함으로 그에 따라 자신이 받아야 할 축복을 경히 여기며 포기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 없고 법적 효력도 없을 것 같은데, 아마도 에서는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음란은 성적 문란함도 분명 포함하지만, 영적 음란함은 주님 외에 다른 것을 훨씬 더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주님 외에서 기쁨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 자체가 음란이며, 이는 곧 장자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주님 주신 복과 낙을 누릴 수는 있지만 그러한 것에 최선의 가치를 두고 추구하면 안되는데, 그것은 바로 노아의 때와 같은 것이며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데 (딤전 4:4) 주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함으로 거룩하게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하신 독생자 즉 하나님께서 육신되신 '모노게누스'시지만 그렇다고 유일하신 아들은 아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그 외아들'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 주님만이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활 후 주님은 이제 하나님의 '맏아들' 즉 장자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로 아들되게 하셨다. 장자는 유산의 두배를 받지만, 그 외의 아들들 역시 유산을 받는 것 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의 소유를 기업으로 받는다. 이러한 기업은 과거 구약 시대에 세대를 거듭할 수록 작아지는 기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한량없으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며 생명이 되신다.
18-21절은 패역한 아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러한 이들을 돌려 쳐죽이라 기록한다. 패역한 아들에 대해 이러한 명을 따르는 것에 대한 결과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부모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면 그 아들은 정말 희망이 없는 경우일 것이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들이며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에도 세상을 위해 죽임 당하셨다. 과거 패역한 아들을 죽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픔이 가득했을 것이라면, 흠없고 순전하신 모노게누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을 죄를 지어서 그 대가로 나무에 달려 죽은 자에 대해 22-23절은 말하는데, 이러한 이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기록한다. 갈 3:13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또 벧전 2:24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라고 기록하는데, 우리가 받을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고, 따라서 주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울부짖으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절규는 십자가 위에서 확실히 아버지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셨고 완전히 끊어졌음을 증거하는데, 이 사건은 우리를 위해서는 승리의 사건이었다.
'나무'라는 말에 히브리어는 ets라는 한 단어 밖에 없고 따라서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나 베어서 목재로 쓰는 나무 모두에 대해 이 말을 쓰지만, 신약에서 헬라어에는 이러한 나무를 말하는 dendron 이라는 단어 외에도 '목재'를 의미하는 xulon이라는 말이 있다. 흥미롭게도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이 xulon이라는 말이 쓰였는데, 놀랍게도 후에 계 2:7의 '생명 나무'에도 쓰였다. 과거 구약에서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난 사건이 있었는데, 지팡이는 더 이상 땅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죽은 나무지만 거기에서 싹이 돋아난 놀라운 사건이며,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궁극적으로 계시록에서는 이 나무가 생명 나무임을 말씀한다. 저주를 의미하는 나무가 그리스도로 인해 이제는 생명을 예표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바라본다.
주님, 독생하신 맏아들이심을 봅니다. 승리하신 주님의 십자가와 또 날마다 짊어져야 하는 나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는 만큼 부활도 따름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