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함은 분리에서 옴 (신 22:1-12)

1-4절은 분실물은 그 어떤 것이든 주인에게 돌려줄 것을 말씀하고 5절은 남녀의 의복을 다르게 할 것, 6-7절은 어미 새와 새끼를 함께 취하지 말 것, 8절은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집짓는 사람이 추락사고를 당하지 말게 할 것, 9절은 포도원에 서로 다른 종자를 심지 말 것, 10절은 밭을 갈 때 소와 나귀 등 다른 동물을 번갈아 쓰지 말 것, 11절은 옷감은 양털과 베실 등 다른 종류의 실을 섞어 짜지 말 것, 12절은 입는 옷 네 귀퉁이에 술을 달 것 등 여러 가지를 기록한다.  누가 잃어 버렸다고 마음대로 취한다면 도둑질을 하고도 같은 변명을 할 수 있다. 오히려 분실된 가축에 대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돌봐 주어야 한다.  공동체 전체에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와 방침이 공유될 때 따로 안전을 담당해야 하는 인력이 필요 없고 평안이 유지된다.

5절의 남녀의 의복을 다르게 하는 문제는 남녀의 서로 다른 패션은 물론이고 남자가 입던 옷을 여자가 또 그 반대로 하지 말 것을 말씀하는 것 같다.  페미니즘 운동은 따라서 반성경적이고 남자의 여성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남녀의 구별이 확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여호와께 가증한' 것 즉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소위 자웅공동체라고 사람의 몸에 남녀 모두의 성기를 갖고 태어나는 이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 결코 하나님의 실수로 치부하거나 비아냥 거릴 수 없다.  인류는 하나님을 떠나 거역했기 때문에 원래 창조하신 아름다운 것들을 잃은 것이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실수가 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해야 하며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판단할 대상이 아니라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소위 자웅공동체를 지닌 사람도 DNA 검사를 하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연히 구별된다.  수술이 가능하면 이에 따라 수술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6-7절의 말씀은 자연 보호는 물론 여러 생명에 대해서 존엄성을 가져야 함을 말하며 그럴 때 그들은 보존되어 결국 인간도 살아 남을 수 있다.  8절 역시 타인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 9-11절은 혼합에 대한 경계인데, 언뜻 보면 이러한 말씀이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혼합을 주의해야 하며 이것은 생활 전면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원래 구분 혹은 분별되는 것을 말하는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 즉 성도들이 성도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과 계속 구분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아예 나와서 따로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고전 5:10에서 말씀한다.  다만 항상 우리를 돌아보고 세상 안에 살아가며 묻어나는 것들에 대해 발씻김을 계속 받아야 하는 것이다.

12절은 흥미로운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소위 정통 유대인들은 아직도 옷 네 귀퉁이에 술을 달아 다닌다. 마치 유대인들의 패션이 되어 버렸는데, 이 술(히 gedil) 이라는 단어는 여기와 왕상 7:17에 성전 내부의 '그물과 사슬 모양으로 땋은 것'으로 단 두번 나온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패션 보다는 줄을 꼬아 단단하게 만들어서 옷을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마치 한복 상의의 끈 같은 기능을 했을 것이라 본다.  이것은 속살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노출이 장려되는 현대 문화를 정죄한다.

주님, 오늘도 새로운 하루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주신 거룩함을 지키고 추구하기 위해 세상의 것들로 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