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신 그리스도에게 촛점이 맞추어지는 율법 (신 25:1-10)
범죄에 대한 징벌에 소위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혹은 죽음에는 죽음 또 벌금형 등도 있었지만 2절은 태형 즉 매질에 대해 기록한다.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수를 정해 때리는데, 3절은 사십까지는 때리지만 그를 초과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이유는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고 말씀한다. 분명 죄는 지어 그에 응당한 매질을 당하지만, 그의 신분은 형제이다. 태형은 매질의 고통도 상당했겠지만 조선 시대의 태형 처럼 엎드려 누워 공개적으로 매를 맞는 것은 매우 큰 수치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죄에 상응하는 매질을 맞는 것은 상관없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4)'라고 말한다. 40대까지 라고는 했지만 20-30대 쯤 해서 살이 터지고 피범벅이 되기 때문에 아마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단 몇 대로 끝냈을 경우가 많았겠지만,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한 두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당했다. 오늘날 사도 바울 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주님은 태형 대신에 채찍질을 당하셨는데, 이는 태형 보다 더한 수치와 고통을 수반했을 것이다.
4절은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기록하는데, 바울은 고전 9:9과 딤전 5:18에 이 말씀을 인용하며 이것은 단지 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이 응당 복음으로 인해 생활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즉 이것은 주의 종이 당연히 받을 사례를 의미하는데, 곡식을 떠는 일을 하고 있는 소가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사역자가 자신의 생활에 정말 필요한 만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5-10절의 말씀은 꽤 흥미로운데, 이러한 내용이 율법에만 있었는지 아니면 당시 고대 사회에 어느 정도 보편적인 실행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자신의 남편이 죽어서 여자가 그로부터 자유하게 되어도 특히 자녀가 없는 경우 혼자 살아가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은 남편의 형제가 우선 책임을 지고 형수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야 했는데, 이것은 형은 물론이고 동생이 죽었을 경우에도 해당하기 때문에 아마도 남자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여도 그 형제의 아내를 따로 맞아야 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것은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데, 그래서 그 책임을 져야 하는 형제는 이를 거부하기를 원할 수도 있지만, 이 문제는 단지 과부를 구제하는 것만이 아닌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6절)' 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거부하게 되면 수치를 당한다. 이러한 수치는 그 여자가 거부하는 형제의 얼굴에 침 뱉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불리게 되는 것인데, 따라서 왠만하면 형제가 죽었을 때 그 아내를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율법이 현재의 기준으로는 황당하게 들린다 해도,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었는데, 바로 보아스가 룻을 이렇게 취했기 때문이다. 이방 여자 룻을 거두어 아내 삼은 보아스는 이방인인 우리를 거두어 당신의 신부를 삼으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 아름다운 스토리가 바로 이러한 율법에 그 배경이 있다.
주님, 보아스 보다 더 은혜로우신 주님의 그 아름다우신 사랑이 오늘도 주의 택하신 백성에게 충만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고통과 인내와 사랑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