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말씀은 물론이고 저주의 말씀도 귀한 언약이 됨 (신 28:15-24)
28장 후반은 저주의 말씀이 선포된다.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선포를 하는 것이겠지만 앞서 27장에 12지파를 둘로 나누어 여섯은 축복을, 또 다른 여섯은 저주를 위해 각각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서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특정 여섯이 축복을 혹은 다른 여섯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선포함에 동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축복을 외치는 것을 말할 때 상대 여섯은 그 축복을 듣는 것이고, 반대로 저주를 말하는 여섯 지파의 상대 여섯 지파 역시 그 저주를 듣는다. 이것은 지난 신 11:26 처럼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를 그들 앞에 두셨음을 말하며, 또 앞으로 30:19에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할 것을 의미한다. 세상 백성들에게는 헤어나올 수 없는 죄의 저주가 묶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앞서 축복의 내용에 대해 그대로 반대되는 저주를 말씀하는데, 다시 그 기준은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에는 축복만 있고 저주가 없는데, '들어오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혹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다'는 말씀에 대해 그 반대의 저주가 없다. 그 이유는 이미 당시 사람들은 죄의 노예로 살며 율법의 저주 안에 있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갈 3:10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세기 부터 기록된 그 언약에 따라 성육신 하셨고 갈 3:13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육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영을 따를 것인지 우리에게 선택이 주어졌다.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 우리가 받은 자유함을 육신의 기회로 삼지 않고 그 영을 따라 사는 것을 택한다.
주님, 복을 약속하신 말씀이나 저주를 말하신 것 모두 우리에게 유익이 됨을 봅니다. 은혜의 말씀은 우리를 이끄시고 저주의 말씀은 우리로 조심하며 삼가하게 합니다. 주의 말씀과 그 영을 따라 살며 생명을 더욱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