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어린 양 (막 14:32-36)

유월절은 많은 양들이 희생되는 날이다. 12절에는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 이라고 기록했는데, 마치 미국에서 추수감사절 기간을 즈음해서 많은 칠면조들이 도축되는 것 같이 사람들에게는 먹고 마시는 축제 기간이지만 정작 칠면조나 양들은 희생되는 날이다.

이 모든 것이 유월절을 기점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유월절'이라는 말을 신약에서는 아람어 '파스카'를 그대로 기록했지만 그 원래 의미는 '넘어가다' 혹은 '지나가다' 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고 넘어가거나 지나가는 날인데, 정작 어린 양은 걸려 잡히고 만다.

흥미로운 것은 35절에 주님께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셨다고 하는데, 이 '지나가다'의 원어는 παρέρχομαι로 '파라 (옆)'와 '에르코마이 (오다 혹은 가다)'의 합성어이다. 36절의 '옮기소서' 라는 말은 παραφέρω인데 역시 '파라'와 '뻬로 (오다, 가져오다, 견디다, 닿다)'의 합성어로 '옮기다, 가져오다, 잘못가다' 등을 의미한다. 모두 '유월' 즉 '지나가다' 혹은 '넘어가다'와 연관이 있다. 주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 때가 지나기를 구하고 계신다.

36절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는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하다. 굳이 주님께서 죽을 필요없이, 그냥 하늘에서 큰 양이 뚝 떨어지면서 큰 음성이 '여기 너희들의 모든 죄를 사하는 어린 양이 있다' 라고 말씀하시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주님께서는 참된 하나님의 어린양, 그 유월절의 그 어린 양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님의 공로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우리도 세상 죄를 위해 죽어야 할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흘려야 할 피가 필요하다면,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 희생의 제물 필요하다면 내 생명 제단에 드리리 주 영광 위해 사용하소서' 라고 해야할까?

주님은 '단번에' 드려지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시 세상 죄를 위해 죽을 필요도 없고 죽을 자격도 없다. 자신이 또 십자가에 죽으려 한다면 주님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참된 안식 즉 완성을 깨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오직 주님의 공로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아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또한 우리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믿는다. 마지막 아담 (고전 15:45) 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그 죽으심 안에 아담 후손인 우리 역시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롬 6:4, 6, 골 2:20, 갈 2:20, 딤후 2:11).

주님, 죽음을 앞둔 주님의 그 깊은 고뇌와 갈등은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를 위해 기꺼이 그 잔을 받으시고 그 길을 걸으셨음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공로와 그 은혜로 이제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옵니다. 아버지께로 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