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잡아 죽이려 했던 이들, 잡히기 두려워 했던 청년, 주님께 사로잡힌 자들 (막 14 : 43-52)

개정역에서는 43절 '파송된 무리가'라고 했지만 원어에는 '파송된' 이라는 말은 없고 '~부터' 혹은 '~와 함께'를 의미하는 '파라' 라는 말이 쓰였다. 큰 무리가 검과 나무 몽둥이를 들고 주님을 잡으러 왔는데,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부터, (그들과) 함께' 온 이들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물리적으로 함께 오진 않았지만 그 보낸 무리가 그들로부터 왔기 때문에 같이 온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님 역시 요 16:28에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에게서'로 번역된 부분이 바로 '파라'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로 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신 분이시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들은 병정들이나 군사도 아니고 사병들인데, 폭력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지도자들은 권위로 다스려야 하지만 폭력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더이상 권위는 없어지고 강압만 남는다.

44절 '입맞추다'의 원어는 헬라어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기본 단어 넷 중에서 하나인 '삘레오 φιλέω' 인데, 흥미롭게도 신약에서 동사형은 단지 25번 그리고 명사형은 29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우기 '에로스'나 '스톨게'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는 남자들끼리도 '입맞춤'을 했는데, 사실 요즘도 중동 지역은 남자들끼리 서로 볼에 입맞추며 문안한다. 이 '입맞춤'으로 번역된 단어는 삘레오에서 파생한 φίλημα이다.

흥미로운 것은 45절 원어에서는 '랍비(여) 랍비(여)'라고 두번 부르고 '입맞추다'는 단어도 그냥 삘레오가 아니라 '카타삘레오'인데, 시제는 아오리스트지만 선생님이라고 두번 불렀다는 것, 그리고 '카타'라는 접두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단지 한번 입맞춤을 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번은 했던 것으로 보인다 (눅 7:45 같은 단어). 아마도 같이 온 무리들에게 확실하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 주려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담담히 받으신다.

49절도 흥미로운데, 48절의 '잡다'는 'συλλαμβάνω 함께 잡다 (혹은 받다)'라는 말이지만 44 46 49 51절 모두의 '잡다'는 'κρατέω'로 '잡다'는 물론이고 '지키다, 의지하다'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49절을 원어로 보면 두가지 다른 느낌을 받는데, '날마다 그 성전 안에서 너희들을 향하여 (내가) 있었다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나를 너희가 잡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경들을 차게 (하기 위함)이다' 즉 주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향해 가르치고 계셨는데 그들은 주님을 잡아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붙잡고 의지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물론 성경을 이룬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죽임을 당해야할 것을 말씀하지만, 49절 전반부 내용과 연결시키면 롬 10: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는 말씀과 그 인용된 구절인 사 65:2 내가 하루 종일 내 손을 펼쳐서 자기 생각을 따라 선하지 않은 길로 걸어가며 반역하는 백성을 향하게 하였나니 (킹제임스흠정역)'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주님은 성전 안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듣고 붙잡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님을 잡아 죽이려 하는 이들이 있다. 진화론을 만든자와 그것을 신봉하는 이들 모두 일부러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잊으려는 것이고 이것은 살아계신 주님을 잡아 죽이려는 처사다. 인생들은 주님을 의지함으로 그를 붙잡을 수도 있고, 친한 척 다가가며 그를 잡아 죽일 수도 있다.

50절은 모두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고 기록하지만 유독 한 청년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벌거벗고 도망친다 (51절). '홑이불로 번역한 단어는 σινδών으로 다음 장 '세마포'로 번역한 말과 동일한 것인데, 수의로 쓰였던 고가의 옷감이다. 왜 이 청년은 벗은 몸에 세마포만 두르고 주님을 따라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왜 이 사람을 마가가 기록했는지도 의아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청년이 마가 자신일 것이라 추측한다.  주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 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마태와 요한 둘 밖에 없는데, 주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마가는 나이가 어린 청소년 (νεανίσκος) 이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마가가 복음서를 처음으로 기록한 인물로 여기는데 마태와 누가 역시 그들의 복음서를 쓸 때 마가복음서를 참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가는 사도행전에도 등장하고 여기에도 암시되지만 그의 어릴 적 시절은 그리 멋져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주님을 알고 변화되어 온전히 주님께 사로잡히자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던 그에 대해 나중에는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11)'고 부탁한다.

폭력배들을 동원해 주님을 잡아 죽이려 한 이들도 있고, 주님 때문에 잡히기 두려워 도망쳤던 이들도 있지만, 그 누구든 주님께 온전히 잡힌 바 (빌 3:12, 딤후 2:26) 되면 변함받아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된다. 오늘도 주님께 사로잡힐 때 나는 나만의 복음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주님, 다른 복음은 없지만 그 복음이 나에게 온전히 복음됨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님께 더욱 사로 잡히며, 저도 주님을 더욱 붙잡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