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리자 (딛 2:1-8)
1절의 '합당한'으로 번역된 'πρέπω'는 '무엇인가 드러나다, 특출나다, 들어 맞다' 등을 의미한다. 무엇인가 합당한 것을 행하거나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원어에서 1절은 '너는'으로 시작하는데, 바울은 디도에게 1장 마지막 부분에서 합당하지 못한 일을 행하는 이들이 분명 있지만 '너는 그러나' 라고 하며 '건전한 교리'에 맞는, 영광을 드러내는 특출난 삶을 살아야 하며, 먼저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함을 알려준다.
생명의 삶 오늘 제목이 '말씀이 비방받지 않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복음에 합당'한 것을 말하는 구절은 빌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한 구절 뿐이다. 빌립보 교회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레데에 있는 디도에게는 '너는 건전한 교리에 맞는 것을 말하고 있으라'고 명한다.
빌립보 교회는 꽤 규모가 있고 자리가 잡힌 교회였으며 성도들도 영적으로 성숙했던 교회지만 (물론 유오디아와 순두게 문제가 있었지만 아마도 이것 조차 열심히 섬기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반면 그레데 상황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사람들은 복음을 제대로 받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마도 영적인 것은 물론 도덕적으로도 기본적 소양이 많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절 이하 각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을 아주 기본적인 것 부터 가르쳐야 하며 이것이 바로 '바른 교훈' 혹은 '건전한 교리'가 된다.
소위 '선교지'에 가면 문화가 다르고 전혀 얘기치 못한 곳에서 일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이방 토속 문화나 잘못된 이념에 찌들어 있던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과오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야 한다는 것인데, 조선 시대 선교사들이 들어와 사역을 시작했던 초기에 일반 백성들에 대한 가르침이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 때를 지금 수준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하지만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다는 느낌..).
2절 '늙은 남자들'는 원어로 πρεσβύτης로 장로 πρεσβύτερος 가 어원이다. 나이가 들어 장로들이 되어야 했을텐데 (소위 장로 계급이 아닌 신앙의 어른) 그냥 나이만 들은 이들이다. 이들은 '절제 경건 신중하며 믿음에 사랑(아가페)에 인내에 온전하게 하고' 라고 하는데, 소위 '도덕'은 하나님을 떠나 성립할 수 없기에 그 기본은 '믿음 아가페 사랑 그리고 인내'이다.
3절의 '늙은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의 행실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야 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모함하는'의 원어는 διάβολος 로서 마4:1의 '마귀'와 같은 단어다. 마귀는 모함하는 자이고 거짓의 아비 (요 8:44) 인데, 나이든 여자들이 모여서 혹은 혼자서 남의 험담을 늘어 놓을 때 그들은 마귀가 되어 버린다. 그대신 그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4절).
이 늙은 여자들에게 명하는 것 중 '많은 술에 종노릇 하지 말' 것이 특이한데, 아마도 그레데는 문화적으로 늙은 여자들이 술 먹는 것에 대해 관대했었나보다. 이것은 계속 등장하는 '정신차림'과 관계 있고 소위 대세를 거스르는 '바른 교훈'이다.
늙은 여자들은 그 행실에서 본을 보임으로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문제는 그들이 젊었을 때 아마도 4-5절의 가르쳐야 하는대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바른 교훈'은 내가 과거 행하지 못하고 실패했을지라도 지금은 붙들어야 하는 현재의 진리와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는 그대로 살지 못했을지라도, 지금 회개함으로 행실이 거룩해질 수 있다면 소위 '어른'으로서 젊은이들을 가르칠 수 있고 또한 가르쳐야 한다.
젊은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가정을 가진 이들로 언급되는데, 고전 7:8에는 과부들에 대해 그리고 38절에는 처녀들에게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지만 딤전 5:14에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 것을 말씀하고, 여기도 역시 젊은 여자들은 (결혼해서)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고 교훈할 것을 늙은 여자들에게 권한다.
우리 말에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남편사랑 (한단어)' 그리고 '아이들 사랑 (역시 한단어)' 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사랑'은 '삘로스'로 '좋아하다' 혹은 '친구처럼 함께 붙어 있다'의 의미다. 젊은 여자들의 본분은 가정을 갖고 남편을 좋아하며 자녀들을 좋아하는 것 그리고 5절의 '집안 일을 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과 보람과 위안을 찾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며 이는 곧 따라온다).
젊은 여자들에 대해서는 늙은 여자들이 교훈할 것을 권하지만, 젊은 남자들에 대해서는 늙은 남자들이 기본적인 본을 보인다고 해서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는 디도가 먼저 분명히 가르쳐야 하는데, 특히 첫번째로 '마찬가지로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파라칼레오) 하고 있으라'고 부탁한다. 이 '신중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σωφρονέω로 '맨 정신'을 의미하는데, 디도서 2장에 이와 관련된 단어들이 2, 4, 5, 6, 12절에 걸쳐 등장한다. 과히 이 2장은 '정신차려' 장이다.
젊은 남자들은 꿈도 많고 기회도 늙은 이들 보다는 비교적 더 많아서 주님 외의 것들에 정신팔려 쾌락을 즐기거나 자신의 이기적인 꿈을 좇는 것에 빠질 수 있는데,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는 말씀처럼 젊은이들은 세상 물질주의나 환락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이상을 볼 수 있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디도는 먼저 분명히 가르치지만 동시에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행위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해야 하는데 (7-8절), 귀한 권위를 부여 받은 만큼 그에 맞게 범사에 선한 일의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주님, 성령이 오심으로 믿는 우리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그렇게 됨으로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이상이 무엇인지 볼 수 있음을 믿습니다. 자신을 장로 혹은 감독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고, 늙은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각기 본분을 잘 이해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정신 차리게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