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침 (딛 3장)
능력은 권위로 부터 나온다. 그래서 싸우려면 능력이 필요하지만 결국은 특히나 영적 싸움은 권위의 문제다. 그런데 세상에도 권위와 권세가 있는데, 믿는 이들은 이들에게 복종해야 할지 아니면 대적해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말씀을 한다.
딤전 2:1-2에는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즉 세상 권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데, 그 분명한 목적은 우리로 신앙 생활을 평안하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 말씀 1절은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라고 하는데, 위 딤전 2:1-2의 말씀과 더불어 여기에는 세상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의 원어는 '아르카이스 카이 엑수시아이스'인데, 동일한 문구가 신약 약 6 군데에서 나오며 특히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동일하게 기록된다.
오늘 말씀과 위 딤전 말씀, 그리고 대표적으로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권세는 2, 3절과 동일하게 모두 위의 '엑수시아'이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세상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에베소서는 그들이 우리가 대적해서 씨름해야 할 대상이라고 한다. 이 차이는 그 세상 권세가 어떠한가에 있는데, 법치로 공정하게 다스리는 권세라면 하나님으로 난 권세임을 인정할 수 있지만, 사람들을 폭력으로 강압하며 압제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씨름해야 할 대상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등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주님의 왕국이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의 세상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은 복종할 권세가 아니라 씨름해야할 대상이다.
5절은 매우 중요한데, 3절에서 '우리도 전에는' 여러 악행을 했었지만,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한다고 기록한다. 3절은 우리가 악행을 했다고 했는데 왜 5절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를 말하고 있을까? 논리대로라면 우리의 행한 '악한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해야 한다고 해야 할텐데 '그 의로움 안에 행위로 부터'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시제인데, 모두 아오리스트로 되어 있다. 즉 주님을 알기 '전에' 행했던 악이나 의가 아니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4절, 여기도 주님의 신성을 말하고 있다), 즉 주님을 믿기 전에나 혹은 그 후에도 우리가 행하는 (아오리스트) 우리의 의 자체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신다 (아오리스트).
특히 이 구원하심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 되는데 이 부분은 원어로 보면 '성령의-중생과 갱신의-씻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맞아 보인다. '중생과 갱신'이 여성 명사 소유격으로 함께 있고 중성 명사 소유격인 '성령'과 마찬가지로 중성명사 소유격인 '씻음'이 같이 가기 때문이다. 즉 이 둘은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씻음'이 라는 경험을 통해서다.
'중생'으로 번역된 παλιγγενεσία는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남' 혹은 '다시 됨'인데, 이 단어는 여기 외에 마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에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라고 번역된 부분으로, 원어에는 '세상'이라는 말은 없지만 문장을 보면 이것은 도래할 시대를 의미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씻음'을 통해 도래할 시대, 그 왕국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지시는데, '풍성히' 부어지신다 (6절). 그래서 그 결과로 7절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가 가능한 것이다. 그 어느 하나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나 의로 되어진 것이 없이 값없이 풍성히 부어지시는 성령님 그리고 그 긍휼과 은혜로 된다.
10절 '이단'으로 번역된 αἱρετικός는 형용사로서 신약에서는 여기 단 한번 나오는 말인데, 그 어원은 '선택하다' 혹은 '(어느) 분파에 속하다'를 의미하는 αἱρετίζω로 이 역시 마 12:18에 단 한번 나오며, 거기에는 '보라 내가 택한 종' 문단에 쓰여서 오히려 좋은 의미로 되어 있고, 또 그 단어는 '선택하다, 한쪽을 선호하다'의 의미인 αἱρέω가 그 어원이다. 개정역에서 '이단'으로 번역된 단어는 역시 αἱρέω에서 파생된 단어인 αἵρεσις인데, 이 말은 영어에서 'heresy' 즉 '이단 (혹은 오류)'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그 원래는 '분파'를 의미해서 자신들과 다른 혹은 갈려 나간 이들을 지칭할 때 쓰인 말이다. 그러고 보면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이단이고,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개신교가 이단이며, 소위 '이단'으로 불리는 여러 분파들은 소위 '정통' 기독교 입장인 것이다.
개신교가 로만카톨릭에서 나온 후 수많은 교파와 분파들로 갈렸는데, 그 중에는 교리적으로 올바른 교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지난 1:4 '공통된 믿음 (혹은 같은 믿음, 코이넨 피스틴)'을 가졌느냐가 핵심인데, 이에 대해 요이 1:7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바른 가르침과 성령의 긍휼하심 그리고 은혜에 의한 구원하심을 따르지 않고 각기 선호대로 분파들을 만드는 이들에 대해서는 힘과 정성과 사랑을 다해 돌이키게 하라고 권하지 않고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혹은 거절하라)'고 권한다. 이들은 '미혹'됐기 때문에 진리가 들어가지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14절을 킹제임스역은 '또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도 필요한 용도를 채워 주기 위해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을 배워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개정역이 더 낳게 번역했는데, 원어의 주요 동사는 '되지 않게 하라'가 아니라 '배우게 하라'이기 때문이다. 이 '배우게 하라 (기본형 배우다)'는 주님께서 마 28:19에 '제자를 삼으라'는 말의 어원인데, 지금 바울은 디도에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과 동일한 명령을 한다.
15절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번역한 부분의 원어에는 '있을지어다'라는 동사는 없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있을지어다' 혹은 '있기를 원하노라' 등등을 쓸 수 있지만 원어는 단지 '그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아멘' 이다. 소위 축복이나 축원이 어떤 정해진 특별한 직책만이 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면 누구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말해야 한다. 지난 1:1-3까지 바울은 서론으로 자신에 대해 길게 얘기한 후 4절부터 디도의 이름을 말하며 '은혜 긍휼 평강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우리 그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했는데, 역시 여기에도 은혜로 마친다.
주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다시 고백합니다. 중생과 갱생의 씻음과 성령의 부어지심 그리고 상속자들로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배우는 것 모두가 은혜에 의해 가능하고 실천되어지고 경험됨을 봅니다. 이러한 열매와 경험이 나의 삶에 그리고 믿는 이들의 삶 속에 충만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