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더 커지소서 (히 2:1-9)

3절을 묵상하며 고민하는데 1시간 이상이 걸렸다. 이제까지는 거의 모든 성경에서 '이같이 큰 구원'으로 번역된 부분을 그냥 받아서 '이같이 위대한' 이라는 말이 '구원'에 대한서술로 여겼는데, 원어를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같이 큰 τηλικοῦτος'은 어쩌면 바로 위 '보응'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큰 (보응)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로 되어서 단지 '구원을 등한시 여김으로 (여긴다면)'로 이어진다. 히브리서를 쓴 주요 목적 중에 하나는 배교를 경계하기 위함인데, '구원' 자체는 물론 위대하고 큰 것이지만, 1절부터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며 계속 경계하는 것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 그리고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신 (3-4절)' 이러한 구원을 등한시 여기면 거기에 따르는 상당하고 공정한 보응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6장 전반부에서는 배교에 대한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6장 9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고 위로한다.

시편 기자의 기록을 통해 인간으로 오신 주님에 대해 6-7절은 기록하는데, 주님은 '다 이루셨'지만 (원어로는 '이루어졌다, 수동태 완료형, 요 19:30) 시간상으로 아직 세상 (혹은 세인 혹은 5절의 '지상 위 거주자 οἰκουμένη')은 온전한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8절 대부분 동사는 아오리스트 시제인데, 다만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에서 '복종하다'는 수동태 완료형이며 '보다'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 이 땅에는 구원이 온전히 이루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언은 1절 처럼 믿음에 대해 더 고민하며 깊게 고려하게 하는데, 주님께서 온전히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데 왜 지난 2천년 넘는 시간 동안 아직도 이러고 있는가 혹은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세상은 이 모양인가 하는 등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래서 결국은 9절에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예수는 천사들보다 작게 되셨는데 (완료, 수동태) 그 이유는 '죽음의 고난'을 통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지게 되셨다 (완료 수동태)'. 또한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만물 위에 죽음을 맛보시다 (아오리스트). 주님은 분명 한번 죽으셨지만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도 알지 못하시고 죽음도 알지 못하신 분이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 따라서 '만물' 중 하나인 우리 역시 한번은 죽겠지만 그 죽음은 주님을 믿음으로 단지 '맛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 믿음에 심각한 도전이 올 때,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히브리서가 주어짐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믿는다는 생각보다는 우리의 믿음이 더욱 분명해 지고 확증되어지기 원합니다. 잠시 작아지신 주님이시지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인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 속에 그리고 나의 실존에 더욱 커지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