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죄인이 아니지만 아직도 혈과 육인 우리들의 시험을 친히 도우심 (히 2:10-18)

주님을 믿었음에도 우리가 아직도 죄인의 신분이라면 왜 주님을 믿는가? 롬 5:6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라고, 그리고 롬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한다. '우리가 아직'이라는 말은 '이제는 아님'을 증명한다. 성경에는 주님을 믿은 후에 '아직도 죄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죄인'이라는 말을 검색해 보면 개정역에 42번 나오는데, 그 중 3/4 정도는 복음서 즉 주님의 복음이 전파될 무렵에 가장 많이 쓰였고, 그 후에는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호칭으로 쓰인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 '죄인'이라고 불렀던 때는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구절인데, 여기에도 원어에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들 중에 내가 첫째다'로 되어 있다. 첫째'이다'의 동사는 현재형인데, 즉 이때 자신을 가리켜 '죄인들 중에 첫째'라는 말은 주님의 구원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실존이기 때문에 죄성이 아직도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다.

오늘 말씀은 이점을 매우 확실히 증거하는데, 10절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 즉 '장남'이신 주님과 그와 100%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함으로 '아들'된 우리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일이며, 이를 위해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11절 역시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고 있는 이들 (하기아조메노, 현재진행 수동태 복수)' 즉 이제 우리는 죄인들이 아니라 '하기아조메노' 즉 '성도들'임을 말씀한다. 성도는 결코 죄인일 수 없는데, 주님께서 아예 직접 우리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신다. 12절은 이에 대해 시22:22 말씀을 인용하고, 13절은 사8:17;사8:18 말씀을 또한 인용한다. 그 옛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킹제임스흠정역은 14절 첫부분을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라고 번역해서 마치 성찬을 연상하게 하지만 이것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라고 번역한 개정역이 더 낫다. '살'과 '피'는 같은 단어지만 이 단어가 함께 '살과 피'로 되어 있는 구절은 원어로 보면 마16:17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고전 15:50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갈 1:16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고 바로 오늘 말씀이다. 즉 이 문단은 항상 '육신을 입은 세상 사람'을 지칭할 때 쓰였는데, 바로 이러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도 역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육신으로 오셔야 죽을 수 있고, 또한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세상 죄를 사하는 즉 '마귀를 멸하시'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이 있기에 부활 역시 가능하고, 따라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신 것이다 (15절).

16절은 조금 어려운데, 결국 주님께서는 천사의 어떠함을 취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의 씨 즉 인간의 어떠함을 취하셨음을 말한다. 하나님이시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동시에 그 언약된 '아브라함의 씨 (롬 9:7)' 즉 믿음의 자손들을 위한 첫째가 되셨다.

17절은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하는데 원어에는 '긍휼하게 되다'라는 부분이 앞 '형제들과 같이 되심'과 더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다. 즉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의 어떠함을 직접 경험하심으로 인생들에 대해 더욱 긍휼함을 베풀 수 있게 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죄들에 대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시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화해를 이루다 ἱλάσκομαι'의 시제는 현재진행형 수동태이다. 즉 주님 자신이 그 화해됨 '안으로 (에이스) 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거나 했던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화목 '안으로 되'셨다. 주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온전히 만났다.

18절의 '고난'은 '환란'과는 다른 말로, 일상적인 삶에서 오는 여러 시험과 관계된 어려움 즉 믿음에 대한 시험은 물론이고 인생의 여러 역경을 포함한다. 이러한 것들을 직접 33년 반 동안 경험하셨기 때문에 '시험받고 있는 자들' 즉 우리 '혈과 육'을 또한 도우실 능력이 있으시다.

주님, 우리 자신을 보면 볼수록 죄에 찌든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도라 그리고 형제들이라 부르고 계심을 봅니다. 주의 형제로 주님을 바라며 주님을 더 닮아가게 하소서. 주님 안으로 더 들어가며 주님 자신을 더 알고 누리기 원합니다. 오늘도 만나는 여러 시험들에 대해 주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이기게 하소서.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