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신성, 그리고 그의 만드신 그의 집인 우리가 구원을 담대히 선포하며 자랑함 (히 3:1-11)
주님께서는 살과 피 즉 혈육의 어떠함을 모두 체험하셨기 때문에 3장 1절은 '그러므로' 라고 시작한다. 그러면서 '깊이 생각하시오' 라고 권하는데, 이 단어는 'κατανοέω'로 여러 의미를 지녀서 '강조'하는 κατα와 '생각하다, 이해하다' 등을 의미하는 νοέω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깊이, 충분히, 다방면으로 생각해보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 대상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다. 12:2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기록하는데, 우리가 바라 보며 추구하며 깊이 생각해야 할 대상은 오직 주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이에 비해 십자가는 '바라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것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개정역에서 '도리'라고 번역한 단어는 ὁμολογία인데, '같다 ὁμο'와 '말하다 λογία'의 합성어로 '같은 것을 말하다' 즉 '고백하다'를 의미한다. 고후 9:13, 딤전 6:12-13과 더불어 히브리서 3:1, 4:14, 그리고 10:23에 나오며 계속 '굳게 붙잡다'와 함께 간다. 즉 주를 믿는 신앙을 고백과 시인을 통해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하게 6절은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한다.
2-5절은 모세와 비교하는데,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분임을 증거한다 (3절). 많은 이들이 이 귀한 구원을 등한시 여기고 유대교의 헛된 것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인데,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승하신 이유를 3-5절에서 설명한다. 3절은 '집 지은 자'를 언급하며 4절은 '만물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데, 이것은 창세기 1:1부터 기록되고 선포된 기본적이고 바꿀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이다. 지난 1:3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증언했는데, 우리는 과학이라는 도구로 이러한 진리를 이해할 수도 밝혀낼 수도 없고 다만 어렴풋 추측만 가능하지만, 이것은 분명 진리이고 현실이다. 또 1:10은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고 기록했는데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1장부터 동일시하며 특히 4절은 3절의 '집 지은 자'와 연결하여 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암시한다.
또 모세는 '종으로서 신실하였'지만 (5절) 6절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이기 때문임을 말하는데, 종과 아들은 천지차이다. 모세는 정말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독생하신 (모노게누스) 아들인 그리스도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했던 변화산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명하셨다 (마 17:5, 막 9:7, 눅 9:35).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그리고 모세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시다.
2-6절에는 계속해서 '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원어에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그의 집'이고 2절에는 '그'가 하나님인지 모세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것은 6절에 가면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이 '하나님의 집'이 '그의 집'이 되는데, 이 '그' 또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의 집 (6절)'인데, 엡 2:22은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기록한다. 문제는 이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특히 '만약 ἐάν' 이라는 가정을 뜻하는 단어와 함께 '잡다'라는 동사가 '가정형'임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만일 굳게 잡고 있지 않다면 더 이상 우리는 그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7절 '그러므로' 이하가 따라온다.
흥미로운 것은 '소망의 확신과 자랑'에서 '확신'으로 번역된 단어 παρρησία는 '모든 것, πᾶς'와 '말하다, ῥέω'의 합성어인데, 대게의 경우 '담대히 말하다'와 함께 간다. 즉 이러한 '확신' 혹은 '용기'는 진리를 담대히 말해내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소위 '표현의 자유 freedom of speech'를 말하는데, 진리에 대해 사람들은 듣기 싫어하고 대적하기 때문에 이를 말해내는 것이 거북할 수 있지만, 용기를 내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동일한 단어는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의 '담력' 혹은 '담대함'에도 쓰였는데, 주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 역시 '입술의 고백'과 관련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담대히 말을 해야 'καύχημα, 자랑 혹은 영광'이 되는 것이다.
주님,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입장이고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저희에게는 이 받은 바 구원이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임을 또한 봅니다. 굳게 잡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서 충성스럽게 세우시고 지키시는 집임을 다시 깨닫고 이러한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됨을 배웁니다. 주님의 복음이 세상은 수치스럽게 여겨도 그 놀라운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며 자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