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 혹은 삼분법 차이와 그 궁극적인 목적 (히 4:12-16)
안식 혹은 멈춤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의 어떠함을 언급하면서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하는데, 생명의 삶에서는 이 칼이 수술용 칼이라고 설명하지만, 당시 수술용 칼은 없었을 것이다. 원어 μάχαιρα는 모든 종류의 검을 지칭하는 말로, 특히 '양날' 검은 살생용 칼인데, 도살용이나 수술용 칼은 (있었다 해도) 한쪽 면만 날을 세우기 때문이다. 보통 한쪽 면만 날을 세운 칼이 '자르기' 위한 것이라면, 이 '양날'검은 '찌르기' 위함인데, '찌르다'의 원어는 διϊκνέομαι로 '찔러 파고 들다 penetrate'를 의미한다. 즉 창 같이 깊이 찌르는 것인데, 특히 중간에 홈을 길게 파서 찌르면 피가 새어 나오도록 만들어진 것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양날검 보다 더 예리하고 침투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앞 11절에 안식에 들어가기 힘쓰자고 말한 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는데, 이 '말씀 λόγος'은 '살아있다'고 한다. 이 동사는 '영원한 생명'에서 '생명 zoe'의 어원인데, 하나님의 λόγος가 생명을 소유한 어떤 것임을 말씀한다. 즉 안식을 온전히 얻기 위해 혹은 일의 끝을 보기 위해 생명이 필요한데, 단지 생명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이 'λόγος'는 '활력이 있다 ἐνεργής (에너지의 어원)' 즉 살아서 팔닥팔닥 뛴다는 것이다. 보통 λόγος는 '기록된 문자'로 보고 '레마'를 '선포된 즉각적인 말씀'으로 이해하지만, 이 λόγος 역시 기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에너지가 넘친다. 우리는 이 λόγος를 읽을 때 우리 속을 찔러 침투하는 것을 경험한다.
원어에는 '찌르다'와 '쪼개다' 사이에 ἄχρι (~때까지) 라는 말이 있어서 '쪼갤 때 까지 침투하고 있다 (현재진행형 이태동사)'의 의미가 되는데, 쪼개다 μερισμός라는 단어는 보통 '나누다, 갈리다'를 의미해서 부정적으로 많이 쓰이지만, 신약에 히브리서에만 지난 2:4절 '성령의 나누어 주신 것'과 여기 단 두번만 나오는데, 그 어원 μερίζω 역시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7:2)'고 기록하며 유독 히브리서에서는 좋은 의미로만 쓰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분리'를 의미하는 거룩을 위해서 나누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특히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 많은 배교의 요소들이 뒤섞여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무분별한 뒤섞임은 절대적인 진리 보다는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만들어 버려서 '배교'를 낳게 한다. 그래서 이러한 '찔러 쪼갬'이 필요하고, '판단'이 필요한데, 그 대상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 내부'임을 밝힌다.
즉 먼저 우리의 혼과 영 그리고 관절들과 골수들을 (원어 복수) 쪼개고 또한 '마음의 의도들과 생각들을' 판단하는데, 그 후에 14절은 '모든 것이 드러남'을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혼과 영을 포함해서 관절들과 골수들이라는 육에 속한 부분까지 역시 깊이 침투하며 '마음의 의도들과 생각들'을 판단한다. 우리의 '혼과 영'을 먼저 언급하고 관절들과 골수들을 말한 것은 아마도 이 '혼과 영'의 차이를 신약에 여기 단 한번씩만 나오는 '관절과 골수'라는 말을 들어 설명한 것 같은데, 사실 '혼'은 비교적 이해가 가능해도 '영'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영'은 하나님께 속한 우리 속 깊은 어떠한 것인데, 이 차이가 마치 관절과 골수의 구분과 비슷하다.
주님께서는 눅 24:39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영은 살과 뼈가 없는 즉 바꿔 말하면 이 살과 뼈는 육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에 육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뼈'를 육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영과 혼의 차이에 대해 '뼈'라는 말 보다는 '골수'를 말하는데, 관절들은 뼈 사이를 연결하는 부분들이기 때문에 알기 어렵지 않지만 골수들은 뼈 속 깊이 숨어 있어서 어디까지가 골수이고 어디까지가 뼈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구분이 힘든 둘 사이 (원어 τέ)를 쪼갠다는 것이다.
그런데 뼈들이 없는 관절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이 '관절'이라는 말은 이미 '뼈'를 내포한다. 인간의 구성 요소를 구분할 때 소위 '영과 육'으로 구분하는 이분법과 '영혼육' 셋으로 구분하는 삼분법이 있는데, 사실 성경은 영혼육 셋 모두를 말씀한다 (살전 5:23). 그럼에도 이분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있을텐데, 이 '혼'은 '육'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이 '혼'이라는 말은 '목숨'의 의미와 더불어 우리 자신 혹은 자아 혹은 인격을 의미하는데, 창세기 창 2:7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자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고 한다. 즉 전에는 흙으로 지어진 몸만 있었지만, '생기' 즉 '영'을 불어 넣으시자 사람이 인격체가 되었음을 말씀한다.
문제는 타락 후에 이 인격체 '혼'이 육적으로 기울게 되었고 (창 6:5), 결국은 '육신이 되었다 (창 6:3)'.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에 그 속에 '영'은 사라질 수 없지만 주님과 단절됨으로 사람의 영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죽은 상태가 되었다. 성경에 '영이 죽었다' 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롬 8:10은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 영이 죽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요즘 소위 '영적 spiritual'인 것에 대해 사실은 영적이 아니라 심각하게 '혼'적인 것, 특히 혼의 잠재력에 기인한 것을 사람들은 영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결국 영의 근원이신 참 하나님 보다는 썩어질 것을 영적 대상으로 섬기며 따르기 때문에 더욱 심히 타락하고 있다.
그렇기에 '혼'과 '영'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고전 2:14는 '그런데 혼적인 사람은 그 하나님의 그 영의 (것)을 받고 있지 않다 그에게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이고 그는 알 수도 없으니 영적으로 (그것은) 분별되고 있다 (원어 참조)'라고 기록하며 '혼'과 '영'이 대립함을 보여준다.
우리의 선함과 의로움이나 선한 의도 등은 '영'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인간의 도덕과 문화적 기준 즉 '혼'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영적인 분별이 없으면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을 해도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진리는 그에게 어리석음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관절들과 골수들을 구분하는 것 처럼 혼과 영을 나누어 분별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사람의 철학이나 선호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침투해야 하며 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12절은 gar (for)이 있고 13절은 '그리고 kai'로 시작되어서 둘이 연결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깊은 것들을 침투해서 나눌 수 있는 능력이며 그 앞에 숨겨진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뒤따르는 14절이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결론이 14-16절에 있음을 알게한다. 즉 이러한 분리와 구분 혹은 분별은 '굳게 잡'음 (14절)이 목적인데, 그 대상은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고 방법은 지난 3:1 동일한 단어 '도리, 신앙 고백 ὁμολογία'을 통해서다.
주님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세운 대제사장 처럼 소위 '엘리트 코스'를 거쳐서 범인들의 삶을 경험도 이해도 못하는 특권층 출신이 아니라 낮게 오셔서 인간의 삶을 똑같이 사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하지만 '죄는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과 그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는 중보자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함과 함께 그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고 있을 수' 있는데, 먼저 '긍휼함을 얻을 수 있고' 또 '도움의 기회 안으로 (들어가)' 은혜를 찾을 수 있다.
주님, 모든 것이 주님으로 인해 열려 있음을 봅니다. 먼저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우리에게 은혜가 되셨으며 언제든 도움이 필요할 때 용기를 갖고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혼과 영을 하나님의 말씀이 찌르고 나누어 무엇이 참으로 영적인 것인가 분별함을 배우기 원합니다. 쓸데없는 것들을 그치고 그 참된 그침으로 가도록 열심을 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