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의 지속적인 훈련을 통한 믿음의 장성함 (히 5:1-14)

지난 4장 14절은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대제사장이심을 말했는데,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했다. 즉 레위 지파에 속해야 했는데, 주님은 유다 지파 후손이다. 5장 초반은 이에 대해 설명하는데 제사장의 시작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므로 아론 이전에 이미 대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을 주목한다. 5절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부르심에 의한 것은 물론이고 아예 하나님으로 부터 나심을 다시 언급하고, 특히 다윗이 시110:4을 통해 예언했던 말씀을 인용한다.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이'반차'라는 말이 여러 번역본에는 계열, 서열, 계통, 직분 등등으로 번역되었다. 헬라어로는 τάξις 이며 여성 명사로서 '질서 order'를 의미해서 고전 14:40에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에도 쓰였다. 이것의 명사형은 τάσσω로 '질서있게 하다, 세우다, 임명하다, 무언가를 정하다' 등의 의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τάξις 라는 단어가 신약에 10번 등장하는데 7번이나 히브리서에 나오고 모두 멜기세덱과 함께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멜기세덱의 질서야 말로 아론의 질서 (7장 11절) 보다 훨씬 이전에 있던 본래의 질서임을 계속 확인한다.

8-10절은 흥미로운데 먼저 8절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의 '아들 이심'의 '이다' 동사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배우다'와 '고난받다'는 아오리스트 시제인데, 특이하게도 '고난받다'는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이다. 우리 말에는 '고난'에 따르는 말은 '받다, 겪다, 당하다' 등 피동형 밖에는 없어서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 고생당하는 것을 말하지만, 원어에 의하면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자발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발적인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는데, 그 결과 '완전해짐 (아오리스트 수동태)'이 '되었다' (9절). 8절은 아들'이다'지만 9절은 '되다 (아오리스트)'인데 주님께서 이전에도 이미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인생을 사시고 고난을 통해 배운 순종으로 주님의 완전하심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역시 그분을 '순종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 (αἴτιος, 이유 근간 원인)이 되시는 것이다. 그런데 10절은 이것이 주님께서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신 증거가 됨을 말한다.

11절은 '그 (멜기세덱)에 대해서 우리에게 그 'ㄹ로고스'가 많아 그리고 말하고 있는 것에 통역이 어려워 (너희가) 듣는 것들에 대해 둔하게 되었기 때문에' 라고 하는데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듣는 것들이 둔해지지 않았더면 멜기세덱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2절은 바울의 때도 그렇지만 현재의 기독교의 모습 역시 그런 것을 볼 수 있는데, '시간을 통해 교사들이 되는 것이 당연한데' 사람들은 (기본적인 것에 대해) '다시 배우고 있는 것이 필요함을 소유하고 있다'. 이 '교사 διδάσκαλος'는 엡 4:11에서 '목자와 교사' 즉 '목사 및 교사'에도 쓰인 말로, 소위 '평신도'들은 성장해서 진리를 선포하며 가르칠 수 있는 데까지 가야 하는데, 제도적으로도 또한 믿음의 부족함으로 인해 이러한 것이 막힌다. 매일 아침 큐티는 필요하지만 그러한 '기본적인' 규티만으로는 교사가 될 수 없고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 때가 있지만 (벧전 2:2a) 계속 젖만을 고집할 수 없고, 그 목적은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벧전 2:2b)'이다. 성장하면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

문맥상 이 '젖'은 기본적인 교리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이심을 알고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은 바로 '단단한' 음식인데, 14절은 '그런데 그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다'로 시작하며 신약에 단 한번 쓰이는 단어들 둘이 등장한다. 이어서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이 단련된 것(완료 수동태, 이미 장성했기에)을 소유함(현재 능동태)을 선악 간 분별을 향하여' 정도로 되어 있는데 '사용 ἕξις'은 습관적인 연습을 의미하며 αἰσθητήριον은 이해와 판단을 하는 지각을 말한다. γυμνάζω 즉 단련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 gymnastic의 어원으로 매우 강도 높은 운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을 놓고 묵상해 보면 '믿음'은 로마서 1:7 '믿음에서 믿음까지 from faith to faith' 즉 처음부터 나중까지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지만, 그대로 머물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고, 처음에는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지속적이며 습관적인 강도 높은 영적 운동을 통해 성장하는데, 이는 마치 '영적 근육'이 단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결국 그 목적은 '선악 간에 분별하는' 것 즉 영적과 지적 성장 모두를 포함한다.

'선과 악'의 문제는 창세기에 처음부터 등장하여 타락의 원인이 된 매우 심각한 것이기도 하지만 바울은 이에 대해 어쩌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이 둘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창세기의 선악 지식의 나무는 단지 쉽게 따먹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 결과는 부정적인 것에 눈이 밝아진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이 믿음의 성장 결과로서 선악간에 분별함은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순종을 배움과 지속적인 영적 운동을 통해 가능한 것을 말한다. 영적인 것은 무언가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도 분명 있지만, 현실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각을 훈련함으로 선악 간에 분별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선악지식의 나무 처럼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 혹은 분리를 가져다 주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 특히 그의 고난을 통한 순종을 배우심의 원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성숙하게 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영적인 성장도 마찬가지다. 장성 τέλειος이라는 말의 어원은 τέλος로 이는 '마지막 (계 22:13)'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지막 즉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 (엡 4:13)'지 않으면 장성한 것이 아니다.